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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에 대하여

 

- 史記중에서-

  

장자(莊子)는 몽(蒙)의 사람이니 이름은 주(周)이다. 일찍이 몽현(蒙縣) 칠원(漆園)의 아전을 지냈다. 양(梁)나라의 혜왕(惠王), 제(齊)나라의 선왕(宣王)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그의 학문은 넓어서 엿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요점은 노자(老子)의 말에서 시작하여 노자의 말에 귀결한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 십여만언(十餘萬言)은 대체로 거의가 우언(寓言)이다. 어부편(漁父篇), 도척편, 거협편을 지어서 공자(孔子)의 무리를 헐뜯고, 그리함으로 노자의 도(道)를 밝히었다. 장자(莊子) 속에 나오는 외루허(畏累虛)니, 항상자(亢桑子)니 하는 따위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지어낸 말로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말을 잘 분석하고 연결하여, 일을 지적하고 인정을 유추(類推)하여 유· 묵(儒· 墨)을 공격하였다. 당세(當世)의 노성(老成)한 학자라고 하는 이도 장주(莊周)의 논란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변해(辯解)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말은 넓고 심원한 데다 제멋대로 자적(自適)하였으므로 왕공(王公)· 대인(大人)으로부터는 훌륭한 인재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장주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예물을 후하게 가지고 가서 맞이하게 하고 정승이 되어줄 것을 원했다. 장주가 웃으면서 초왕의 사자에게 말하였다.
“천금이란 돈은 큰 이득이고 경상(卿相)이란 벼슬은 높은 지위이다. 그대는 교제(郊祭)에 제물로 바칠 소를 보지 못하였는가? 그 소를 여러 해 동안 먹여 기르고, 아름다운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히고는 태묘(太廟)에 제물로 끌고 들어간다. 그 때가 되어서 돼지가 되기를 바란들 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빨리 가라. 나를 더럽히지 마라. 내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 물에서 유희(遊 )하면서 스스로 유쾌하게 지낼지언정 나라의 임금에게 몸을 속박당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가 내 마음을 쾌적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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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BC365?∼BC290?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또는 장자가 저술한 저서 《장자》를 가리킨다.

〔인 물〕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나라의 몽(蒙 河南省 商邱縣) 출신. 전국시대인 BC300년 무렵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며, 칠원(漆園)의 말단관리가 된 적이 있을 뿐 대개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논리학파(論理學派)의 혜시(惠施)와 친하게 교유했지만 그 밖의 행적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 보통 그를 가리켜 노자(老子)의 사상을 이어받고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대성시킨 사람이라고 하여 노장사상가(老莊思想家)라고 일컫기도 하나, 노자의 사적(事績)과 연대(年代)가 애매하다는 사실과 두 사상의 차이 등에서 그 전후관계에는 의문점이 많다. 노자의 현실적인 성공주의와는 달리 장자에서는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 自己中心說)과 전병(田騈)의 귀제설(貴齊說 萬物平等說)의 영향을 받은 사변적(思辨的) 경향이 강하다.

〔서 적〕

《장자》는 33편으로 내편(內編) 7, 외편(外編) 15, 잡편(雜編) 11로 나뉜다. 그 가운데에서 내편이 장주(莊周)의 근본사상을 기술한 것이고 외편과 잡편은 내편의 뜻을 부연한 것으로서 그의 후학들이 연구· 발전시킨 것이라 하며, 노자와의 절충이나 다른 사상과의 교류 등을 엿볼 수 있다. 대략 전국시대 말기(BC 3세기 말)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원문(原文)의 분합(分合)은 그 뒤에도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33편으로 정착된 것은 진(晉)나라 곽상(郭象)의 주석본이 나온 이후의 일이다. 곽상의 주석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완본(完本)의 기본자료이며, 그 뒤에도 당(唐)나라 성현영(成玄英)의 주소(註疏)와 송나라 임희일(林希逸)의 구의(口義) 등 많은 주석본이 나왔다.

〔사 상〕

장자의 사상은 우선 제물사상(齊物思想)을 근저(根底)에 두고 있다. 이것은 현실의 모든 차별상(差別相)을 평등시하는 일종의 관념철학으로서 생사· 귀천· 대소 등을 비롯하여 시비선악(是非善惡)문제에 이르기까지의 대립상(對立相)을 제일시(齊一視)하는 초월적 입장을 강조하고, 그 대립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실적 고뇌를 초탈하려는 것이다. 이런 높은 경지를 < 도추(道樞 道의 中心)> 또는 < 천균(天鈞 天의 中心)> 이라 했다. 그리고 속계의 속에서 해방된 자유스러운 경지를 < 소요유(逍遙遊 구애받는 것이 없는 느긋한 놀이)> 라고 이름지었고 이 경지에 달하는 방법을 < 인순(因循)> 이라고 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 즉 자연의 절대적 도리에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사망아(無私忘我)의 태도가 요구되며, < 좌망(坐忘)> 이 곧 그것이다. 인간의 얕은 지혜를 버리고 스스로 이루어지는 절대적 이(理)와 합일하는 곳, 즉 < 천균(天均)> 을 따르는 경지야말로 구애받지 않는 느긋한 정신의 자유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초월적 종교성이 있다. 즉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철학과 거기에 기초를 두는 인순주의에 의해서 정신의 자유와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후세에의 영향〕

그런데 장자의 후학에 이르러서는 초탈의 종교성은 신선사상(神仙思想)과의 결합을 보여 내면적인 수행의 강화를 추구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현실적 효과를 추구하는 세속적 관심도 커져서 처세와 정치적 성공까지 추구하게 되면서 《노자》와 접근하게 되었다. 그 양상 등은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서 볼 수 있으며,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방법으로서 내적 본성에 대한 주시가 있고, < 성(性)에 반하는> 있는 그대로의 < 성명(性命)의 안락에 장착하는> 것이 강조되는 것도 그 특징이다. 이어서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회남자(淮南子)에서는 노장을 절충하는 형식으로 모든 사상을 통합하려고 했는데, 거기에서도 이런 경향이 특별히 현저했다. 《장자》가 즐겨 읽히게 되어 그 사상이 유행한 것은 위진(魏晉) 때부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이르기까지였으며, 이른바 청담(淸談)의 내용도 대부분이 장자와 관련되고 귀족들의 초속적(超俗的)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후한(後漢) 때에 일어난 도교(道敎)는 노자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하여 신격화하였고, 점차 노자를 비조(鼻祖)라하여 받들었지만 그에 따라 장자도 또한 신선화 하여 신격화되었다.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에 의해서 진령(眞靈)이라 하여 제3급에 올려졌으며, 당나라 현종(玄宗)에 의해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존칭을 받아 그의 저서가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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