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태후[王太后]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6년에 죽었다. 한경제의 모후로써 왕(王) 성이다. 처음에 장릉(長陵) 인 김왕손(金王孫)에게 시집을 가서 딸을 하나 낳았다. 후에 그녀의 모친이 관상가의 말을 믿고 왕태후를 김왕손과 이혼시키고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문제 때 태자인 경제의 동궁으로 들어가 미인(美人)이 되어 총애를 받아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경제가 제위에 오르자 부인이 되고 아들 유철(劉徹: 후의 무제)은 교동왕(膠東王)에 봉해져 그녀는 교동왕태후로 불리워졌다. 평소에 사이가 좋은 경제의 누이 장공주(長公主)와 모의하여 경제의 총비 율비(栗妃)를 모함하여 폐출시키고 동시에 율비의 소생 유영을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경제 7년 황비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유철은 태자로 책봉되었다. 경제가 죽고 유철이 뒤를 잇고 그녀는 황태후가 되어 두태후(竇太侯)와 궁중의 세력을 다투아 무제 초년에는 영향력을 크게 발휘했다. 그녀는 권력을 이용하여 왕가의 출신 3명을 제후로 만들었다. 그녀의 동모이부 동생 전분(田蚡ア)은 승상이 되어 그녀의 비호아래 전횡을 일삼고 발호했다. 또한 그녀의 전남편 사이의 소생인 딸을 수성군(脩成君)에 임명했는데 수성군의 아들은 권력을 믿고 장안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 왕통[王通] 수(隋)나라 강주(絳州) 용문(龍門) 사람으로 자는 중엄(仲淹)인데, 촉군 사호서좌(蜀郡司戶書佐)를 지내다가 그만두고 돌아와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저술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한다.
♞ 왕패궤대[王霸詭對] 후한(後漢) 왕패(王霸)가 광무제(光武帝)를 따라 전장에 나가서 호타하(滹沱河)를 건너려 할 때 척후병이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다고 보고해 오자 광무의 명을 받고 왕패가 재조사하러 나가게 되었다. 이때 왕패가 사람들이 걱정할까 염려하여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고 거짓말로 답변했는데 뒤에 군대가 현장에 도착해 보니 그동안에 얼음이 얼어 건널 수 있었다는 고사이다. <後漢書 王霸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