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李陵] 한무제(漢武帝) 때 무장, 이광(李廣)의 손자다. 자청하여 기도위(騎都尉)로 보기(步騎) 5천을 거느리고 흉노(匈奴)를 치다가 패하여 항복. 선우(鮮于)의 우교왕(右校王)이 되었다. 그가 소무(蘇武)에게 보낸 편지 중에 자기가 실절(失節)한 것을 구구히 합리화(合理化)한 문구로 “헛되이 죽는 것이 때를 보아 절개를 세움만 못하다.[虛死不如立節]” 했다.
♞이릉[夷陵] 초나라 선왕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그 위치는 지금의 호북성 의창(宜昌) 동남이라는 사기색은의 설과 호북성 의성(宜城) 외서산(外西山)이라는 수경(水經)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이릉매기[李陵埋旗] 이릉은 한 무제(漢武帝)때 농서(隴西) 성기(成紀)사람으로 자는 소경(少卿), 명장 광(廣)의 손자이다. 천한(天漢) 2년(BC 99)에 보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선우(單于)의 기병 3만 명과 접전 끝에 패하여 쫓기다가 깃발과 기물들을 땅에 묻고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그의 실책을 규탄하였으며 노모와 처자 등 전 가족이 처형되었다. <漢書 卷五十四 李陵傳>
♞이릉유적[李陵遺迹] 이릉(李陵)은 한(漢) 나라 장수로 흉노(凶奴)와 싸우다가 항복하였는데 그의 친구 소무(蘇武)가 흉노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올 때에 서로 하양(河梁)에서 작별하면서 시를 지었다.
♞이릉지화[李陵之禍] 기원전 88년 한무제(漢武帝) 2년에 기도위(騎都衛)였던 이릉(李陵)이 흉노를 정벌하러 출정했다가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렀을 때 한나라 군사들보다 몇 배나 많은 흉노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은 힘이 다하여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한무제가 중국에 남아 있던 이릉의 가족을 잡아들여 죽이려고 하자 사마천이 나서 이릉을 변호했다. 이에 한무제가 노하여 사마천을 하옥시키고 궁형에 처했다. 이 일에 대해 사마천의 심경을 자세하게 토로한 글이 한서의 사마천열전 중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실려있다.
♞이릉환[李陵弮] 이릉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의 사람으로, 활을 아주 잘 쏘았는데,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흉노와 싸우다가 화살이 다 떨어져서 항복하였다. <漢書 卷五十四 李廣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