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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지필[董狐之筆]두려움 없이 사실대로 기록한다
춘추시대 진(晉)의 영공(靈公)은 사치하고 잔인하며 방탕한 폭군이었다.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 궁중의 담을 장식하는가 하면 걸핏하면 누대(樓臺)에서 잔치를 벌여 사람을 던져 죽이는 것을 즐겼다. 또 궁중 주방장이 웅장(熊掌:곰 발바닥)을 좀 덜 삶았다고 죽여 시체를 난도질해서는 광주리에 담아 궁녀를 시켜 머리에 이고 다니게 했다. 참다못한 승상 조순(趙盾)이 수차 간언(諫言)했지만 오히려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 어느 날 아침, 자객이 조순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조복으로 정장을 한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자객은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스스로 나무에 머리를 찧어 자결하였다. 영공은 계획을 바꿔 주연(酒宴)에 초대하여 죽이고자 했다. 술이 반쯤 돌았을 때 갑자기 숨어 있던 병사들이 덮쳐 죽이려고 하였다. 이 때 호위병 하나가 막아서는 바람에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이 틈을 타 그는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옛날 사냥을 나갔을 때 사흘을 굶어 신음하던 청년을 구해 준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후에 그는 영공의 호위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공의 포악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고 마침내 조천(趙穿)이 그를 죽이고 만다. 그는 조순의 사촌 동생이었다.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던 조순은 잠시 국경 부근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당시 진의 태사(太史)로 있던 동호(董狐)가 사책(史冊)에 이렇게 적었다. 「조순이 국군을 시해(弑害)했다.」 깜짝 놀란 조순이 극구 변명하자 동호가 말했다. “물론 대감께서 직접 영공을 시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대감은 승상으로서 국내에 있었고, 또 조정에 돌아와서는 범인을 처벌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감께서 공식적으로 시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조순은 자기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동호의 뜻에 따랐다. 훗날 공자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법을 따라 굽힘이 없이 썼다. 조순은 옛날의 훌륭한 대부이다. 법에 따라 부끄러운 이름을 뒤집어썼다. 안타깝다. 국경을 넘었더라면 악명을 면했을 텐데..(孔子曰 董狐古之良史也 書法不隱 趙宣子古之良大夫也 爲法受惡 惜也 越境乃免).” 이 때부터 동호는 사관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동호지필(董狐之筆)」이란 ‘동호의 필법’, 즉 역사를 기술하되 권세 따위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동호직필(董狐直筆)」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직필(直筆)」이라고도 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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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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