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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성시[門前成市]문앞에 시장이 선듯 권력에 줄을 서다
전한 말기 애제(哀帝) 때, 조정의 실권은 외척의 손에 넘어가고 황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소년에 빠져 정치는 돌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있던 정숭은 황제의 인척으로, 이름난 학자 포선(飽宣), 중신인 왕선(王善) 등과 함께 매번 외척들의 횡포와 부패를 황제에게 직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황제의 눈에 난 것은 물론 아첨배들로 부터는 경원의 대상이 되었다. 그 무렵 상서령(尙書令)으로 있던 조창(趙昌)은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어느 날 애제에게 정숭이 종친과 내통하여 왕래가 잦다고 무고하였다. 애제는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경의 문전이 저자와 같다고 하던데(君門如市人) 그러면서도 나로 하여금 하지 말라, 끊으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정숭이 대답하였다. “신의 집 문 앞이 저자와 같을지라도 신의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臣門如市 臣心如水). 황공하오나 한번 더 조사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애제는 황제의 말에 대꾸를 하였다며 노발대발하여 평소 눈엣가시였던 정숭을 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사예(司隸)인 손보(孫寶)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을 공박하고 정숭을 변호했지만 애제는 오히려 손보마저 삭탈관직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내쳤다. 정숭은 그 후 옥사하였다. 한서(漢書) 정숭전(鄭崇傳), 손보전(孫寶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문정여시(門廷如市), 문정약시(門廷若市)와 같은 말로, 문 앞에 마치 시장이 선 것 같다는 뜻으로, 세력이 있어 찾아오는 사람이 매우 많음을 나타내며, 후일 고위 관직자가 사람을 끌어들여 뇌물을 받거나 패거리를 만드는 행위를 경계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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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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