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시각과 청각과 지력을 혹사시키지 마라
- 한비자 제20편 해노[6]-
청각과 시각과 지력(知力)은 천성이지만 행위와 생각은 인위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에서 주어진 시력에 의해서 보아야 되고, 하늘에서 주어진 지력(知力)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눈을 함부로 쓰면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며, 청각을 혹사하면 귀가 들리지 않게 되며, 생각이 지나치면 지력이 혼미하게 되는 것이다. 눈이 안보이게 되면 흑백을 가리지 못할 것이며, 귀가 들리지 않으면 소리의 맑고 흐림을 식별하지 못할 것이고, 지력이 혼미하게 되면 이해득실의 한계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눈이 흑백을 가리지 못하는 상태를 맹(盲)이라 하며, 귀가 소리의 청탁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을 농(聾)이라 하고, 마음이 이해득실의 한계를 판단하지 못하는 것을 광(狂)이라 한다. 맹이 되면 백주에도 위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농이 되면 벼락이 떨어져도 알지 못하며, 광이 되면 인간 사회의 법령위반부터 일어난다. 화도 모면할 수 없다. 노자가「사람을 다스린다」고 한 것은, 행위의 절도를 적당히 하고 생각하는 노력을 절약하는 일이며, 이어서「하늘을 섬긴다」고 한 것은, 시력과 청각을 극도로 사용하지 않으며, 지력을 극도로 작용시키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시력과 청각과 지력을 극도로 사용하거나 작용시키게 되면 정신을 소모하게 된다. 정신을 소모하는 일이 많으면 맹, 농, 광 등의 화를 입게 된다. 그래서 인색한 것이다. 인색하다는 것은 정신을 소중히 사용하고 시력을 아끼고 아껴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노자는「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인색함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사용하는 방법은 부산하다. 부산하면 낭비가 많다. 낭비가 많음을 치(侈)라 한다. 그와는 반대로 성인의 정신 사용법은 조용하며 침착하다. 조용하면 낭비가 적다. 낭비가 적은 것을 색(嗇)이라 한다. 색의 술(術)은 자연의 도리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색을 실행하게 되면 그 사람은 도에 따라 이(理)에 복종하는 셈이 된다. 세상 사람들은 병이 들어 화를 당하여도 물러설 줄을 모르고, 도리에 따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인은 화가 미칠 징조를 간파하기 전에 이미 허심탄회하여 도리에 복종한다. 이것을 조복(早服)이라 한다. 조복이라는 것은 일찍 도를 쫓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노자는「전심전력으로 색(嗇)을 지켜야만 초복(早服)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 韓非子 第20篇 解老[6]- 聰明睿智, 天也 動靜思慮, 人也. 人也者, 乘於天明以視, 寄於天聰以聽, 託於天智以思慮. 故視强, 則目不明 聽甚, 則耳不聰 思慮過度, 則智識亂. 目不明, 則不能決黑白之分 耳不聰, 則不能別淸濁之聲 智識亂, 則不能審得失之地. 目不能決黑白之色則謂之盲 耳不能別淸濁之聲則謂之聾 心不能審得失之地則謂之狂. 盲則不能避晝日之險, 聾則不能知雷霆之害, 狂則不能免人間法令之禍. 書之所謂「治人」 者, 適動靜之節, 省思慮之費也. 所謂「事天」 者, 不極聰明之力, 不盡智識之任. 苟極盡, 則費神多 費神多, 則盲聾悖狂之禍至, 是以嗇之. 嗇之者, 愛其精神, 嗇其智識也. 故曰:「治人事天莫如嗇.」 衆人之用神也躁, 躁則多費, 多費之謂侈. 聖人之用神也靜, 靜則少費, 少費之謂嗇. 嗇之謂術也, 生於道理. 夫能嗇也, 是從於道而服於理者也. 衆人離於患, 陷於禍, 猶未知退, 而不服從道理. 聖人雖未見禍患之形, 虛無服從於道理, 以稱早服. 故曰:「夫謂嗇, 是以早服.」
|
|
|
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
|
|
|
Copyright (c) 2000 by Ansg All rights reserved <돌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