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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와 권세는 양립될 수 없다
- 한비자 제40편 난세[3]-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신자는 권세에는 관리나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는데, 앞의 사람은「현자를 얻음으로써 잘 통치된다」고 했다. 이 앞사람의 의견은 정당하지 못하다. 도대체 권세는 그 이름이 하나이지만 사실은 그 변화가 끝이 없는 것이다. 권세가 자연의 추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재론할 필요가 없다. 내가 말하는 세력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권세 바로 그것인 것이다. 지금 앞의 사람은「요나 순이 세력을 얻으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걸이나 주가 세력을 얻으면 천하가 혼란해진다」고 했다. 나는 요나 걸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다는데 대해서 시비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의 사람이 말한 세력은 인간이 만든 권세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만일 요나 순이 태어나면서부터 군주의 지위에 오르도록 정해져 있었다면 걸이나 주와 같은 자가 비록 10명이 있어도 소란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의 추세가 다스려 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걸이나 주가 태어나면서부터 군주의 지위에 오르도록 되어 있었다고 하면 요나 순과 같은 인물이 10명이 있어도 잘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추세가 혼란을 빚어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추세가 다스리도록 되어 있을 때에는 혼란이 일어나지 않으며, 추세가 혼란한 때는 잘 다스려질 수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 경우의 세력은 물론 자연의 추세인 것이며,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내가 말하는 권세는 사람이 만든 세력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한도 내에서 어짊은 필요 없다고 생각된다. 방패와 창을 파는 자가 있었다. 그 자는 방패의 견고함을 말하기 위해서 그것을 뚫을 물건은 없다고 말했다. 동시에 창을 자랑하며 그것으로 뚫리지 않는 물건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구경꾼이 그 창으로 그 방패를 뚫을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물건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패와 어떤 물건이라도 뚫을 수 있는 창을 아무리 선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현자의 길은 권세로서 금지시킬 수가 없지만 권세는 어떤 일이나 금지시킬 수 없는 것이 없다. 금지시킬 수 없는 현자의 길과 어떤 일이나 금지시킬 수 있는 권세의 길을 병립시키는 것은 모순이다. 요컨대 현자와 권세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요, 순, 걸, 주는 천년에 한번 나타날까 말까 한 희귀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세상 정치가를 보면 어중간한 인물이 태반이다. 내가 권세에 대해서 논의할 경우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어중간한 인물에 대해서이다. 중등급의 군주는 위로는 요와 순에 이를 수 없고, 아래로는 걸과 주처럼은 타락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법률을 지키며 권세를 누리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법률을 일탈하여 권세를 버리면 나라가 문란해진다. 지금 권세를 버리고 법률에 위배하며 요나 순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하자. 요나 순이 나타나면 잘 다스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 세대는 문란하고 한 세대는 잘 다스려지는 것이 된다. 법률을 지키고 권세를 누리며 걸이나 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하자. 걸과 주가 나타나면 문란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 세대는 잘 다스려지고 한 세대는 문란해지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천 세대가 문란해지고 한 세대가 다스려지는 것과 천 세대가 다스려지고 한 세대가 문란해지는 것의 차이는 두 사람이 준마를 몰아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무를 휘는 도구를 버리고, 물건의 길이나 무게를 다는 계기에 의하지 않으면, 해중과 같은 명인에게 수레를 만들게 한다 하더라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고무하는 포상이나 사람을 위협하는 형벌이 없이, 또 형벌을 버리고 법률을 버린다면 비록 요나 순이라 하더라도 불과 세 집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권세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현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또 백일 동안이나 음식을 취하지 않고, 좋은 쌀밥이나 고기 따위가 얻어지기를 기다린다면 그것이 얻어진다 하더라도 굶고 있는 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 요나 순과 같은 현자에 의해서 현대의 백성을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좋은 쌀밥이나 고기를 입수한 다음 굶주림을 메우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앞사람은「좋은 말로 끌게 하는 견고한 수레를 무식한 몰게 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왕량이 수레를 부리게 되면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대체 먼 월나라 사람으로 수영 잘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중원에서 물에 빠진 자를 구한다면, 월나라 사람이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 하더라도 물에 빠진 자를 구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 왕량을 맞이하여 현재의 말을 다루게 한다는 것은 월나라 사람에게 중원의 물에 빠진 자를 구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간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생각건대 준마를 매어 놓은 견고한 수레를 부리는 데에 50리 사이에 정거장을 하나씩 두고, 보통 마부에게 그것을 부리게 한다면 속력을 빠르게 하거나 원거리를 질주할 수 있을 것이며, 천리길을 하룻만에 주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옛날의 왕량을 믿을 필요가 있겠는가. 또 앞사람의 말에 의하면 말을 부릴 경우, 왕량에게 시키지 않고 몸종에게 다루게 하면 실패한다는 것이었고, 정치도 요나 순에게 맡기지 않으면 결국은 걸이나 주가 집권할 때처럼 문란해진다고 한다. 이것은 음식물의 맛은 엿이나 꿀처럼 단 것이 아니면 반드시 쓴 약 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웅변에 불과한 것으로서 도리에 맞지 않는 극단적인 편견이다. 어찌 도리에 맞는 신자의 말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앞사람의 의견은 신자의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
- 韓非子 第40篇 難勢[3]- 復應之曰: 其人以勢爲足恃以治官 客曰「必待賢乃治」, 則不然矣. 夫勢者, 名一而變無數者也. 勢必於自然, 則無爲言於勢矣. 吾所爲言勢者, 言人之所設也. 今曰: 堯· 舜得勢而治, 桀· 紂得勢而亂, 吾非以堯· 舜爲不然也. 雖然, 非人之所得設也. 夫堯· 舜生而在上位, 雖有十桀· 紂不能亂者, 則勢治也 桀· 紂亦生而在上位, 雖有十堯· 舜而亦不能治者, 則勢亂也. 故曰:「勢治者則不可亂, 而勢亂者則不可治也.」 此自然之勢也, 非人之所得設也. 若吾所言, 謂人之所得設也. 若吾所言, 謂人之所得勢也而已矣, 賢何事焉? 何以明其然也? 客曰:「人有鬻矛與楯者, 譽其楯之堅, ‘物莫能陷也’, 俄而又譽其矛曰: ‘吾矛之利, 物無不陷也.’ 人應之曰: ‘以子之矛, 陷子之楯, 何如?’ 其人弗能應也.」 以爲不可陷之楯, 與無不陷之矛, 爲名不可兩立也. 夫賢之爲勢不可禁, 而勢之爲道也無不禁, 以不可禁之賢與無不禁之勢, 此矛楯之說也. 夫賢勢之不相容亦明矣. 且夫堯· 舜· 桀· 紂千世而一出, 是比肩隨踵而生也. 世之治者不絶於中, 吾所以爲言勢者, 中也. 中者, 上不及堯· 舜, 而下亦不爲桀· 紂. 抱法處勢, 則治 背法去勢, 則亂. 今廢勢背法而待堯· 舜· 堯· 舜至乃治, 是千世亂而一治也. 抱法處勢而待桀· 紂, 桀· 紂至乃亂, 是千世治而一亂也. 且夫治千而亂一, 與治一而亂千也, 是猶乘驥· 駬而分馳也, 相去亦遠矣. 夫棄隱栝之法, 去度量之數, 使奚仲爲車, 不能成一輪. 無慶賞之勸, 刑罰之威, 釋勢委法, 堯· 舜戶說而人辯之, 不能治三家. 夫勢之足用亦明矣, 而曰‘必待賢’, 則亦不然矣. 且夫百日不食以待粱肉, 餓者不活 今待堯· 舜之賢乃治當世之民, 是猶待粱肉而救餓之說也. 夫曰‘良馬固車, 臧獲御之則爲人笑, 王良御之則日取乎千里’, 吾不以爲然. 夫待越人之善海游者, 以救中國之溺人, 越人善游矣, 而溺者不濟矣. 夫待古之王良以馭今之馬, 亦猶越人救溺之說也, 不可亦明矣. 夫良馬固車, 五十里而一置, 使中手御之, 追速致遠, 可以及也, 而千里可日至也, 何必待古之王良乎! 且御非使王良也, 則必使臧獲敗之 治非使堯· 舜也, 則必使桀· 紂亂之. 此味非飴蜜也, 必苦菜· 亭歷也. 此則積辯累辭, 離理失術, 兩未之議也, 奚可以難夫道理之言乎哉? 客議未及此論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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