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酒五首[其三]대주5수3 / 신선도 취하면
- 白居易[백거이] -
丹砂見火去無跡[단사현화거무적] 단사는 선약되러 가서는 자취 없고
白髮泥人來不休[백발니인래불휴] 백발은 달라붙어 오기에 쉼이 없네
賴有酒仙相暖熱[뇌유주선상난열] 다행히 술꾼 있어 서로가 불콰하니
松喬醉卽到前頭[송교취즉도전두] 신선도 취하면 곧 엎어지고 만다네
❍ 단사현화[丹砂見火] 見(현)은 만난다는 의미. 단사는 불을 만나 단약이 된다. 단약은 곧 선약이다.
❍ 단사[丹砂] 단사는 복용하면 불로장생한다는 단약(丹藥)을 만들 때에 쓰이는 광물이다. 옛날 도사(道士)들은 단사를 원료로 연단(鍊丹)을 하여 불로장생의 비약(祕藥)을 구워냈는데 이를 연단술(鍊丹術)·연금술(鍊金術)·점금지술(點金之術)이라고도 한다. 여러 가지 쇠붙이를 금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하였다. 본초(本草)에 의하면 “단사를 오래 먹은 자는 신명(神明)을 통하고 늙지 않으며 몸이 가벼워져 신선이 된다.”고 하였다.
❍ 단사[丹砂] 수은으로 이루어진 황화광물로 도가(道家)에서 이른바 장생불사약으로 칭하는 단약(丹藥)을 고는 재료로서, 전하여 장생불사약을 가리킨다. 광굉명집(廣宏明集)에 “단사(丹砂)를 태워 수은(水銀)을 만들고, 수은을 되돌려 단사(丹砂)를 만들기 때문에 환단(還丹)이라고 한다[燒丹成水銀 還水銀成丹 故曰還丹]”라고 하였다. 단사(丹沙).
❍ 단사[丹砂] 주사(朱砂).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로 선약(仙藥)을 달일 때 넣는 재료이다. 진(晉)나라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 금단(金丹)에 “모든 초목은 태우면 재가 되지만 단사는 태우면 수은이 된다. 태우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 도로 단사가 되는데, 이를 먹으면 장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 니[泥] 붙이다. 자주빛 질흙. 칙서(勅書)를 봉하는 데에 썼음. 뜻이 바뀌어, 물건을 붙이는 데에 쓰는 진흙처럼 차진 것의 통칭. 금니(金泥).
❍ 니인[泥人] 토우(土偶). 흙 인형. 지옥에 떨어진 사람. 진흙 구덩이에 빠진 사람.
❍ 니서[泥絮] 진흙에 붙은 버들솜. 버들솜이 진흙탕에 떨어지면 다시는 날 수 없으므로, 이로써 마음이 선정(禪定)에 들어 고요하여 다시는 동요가 없음을 비유한다.
❍ 뇌유[賴有] ~이 있어 의지하다. ~의 덕분이다. ~하니 다행이다.
❍ 주선[酒仙] 세속을 초월하여 술을 즐기는 사람.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 세속(世俗)에 구애(拘礙)됨이 없이 두주(斗酒)로써 낙을 삼는 사람.
❍ 난열[暖熱] 따뜻하게 느껴지는 열. 온기
❍ 송교[松喬] 선인 적송자(赤松子)와 왕자교(王子喬)를 말한다.
❍ 적송자[赤松子] 적송자(赤誦子)라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신농씨(神農氏) 치세에 비를 내리게 하는 우사(雨師)였다. 적송자는 일찍이 수옥(水玉)을 복용했는데, 이것은 병을 물리치고 수명을 늘려주는 약물이었다. 그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도 해를 입지 않았다. 그는 자주 신선들이 거주하는 곤륜산(崑崙山)으로 들어가 서왕모(西王母)의 석궁(石宮)에서 지냈다. 그는 또 비구름을 타고 마음대로 다녔다. 염제(炎帝)의 어린 딸이 그에게 도법을 배워 신선 중의 사람이 되어 그와 함께 세상 밖으로 숨었다. 고신씨(高辛氏)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도 다시 세상에 나와 우사의 역할을 맡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선이 되었다.
❍ 적송자[赤松子] 전설 속의 선인(仙人)이다. 한서(漢書) 안사고(顔師古)의 주(注)에 “적송자는 선인(仙人)의 호(號)이다. 신농씨(神農氏) 때에 우사(雨師)였다[赤松子仙人號也 神農時爲雨師]”라고 하였다. 음식으로 물을 먹고 옥으로 옷을 해 입은 적송자는 신농에게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견디는 방법을 일러주었고, 금화산(金華山)에 살다가 스스로 몸을 태워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 왕자교[王子喬] 주영왕(周靈王)의 태자였다. 그는 생황 불기를 좋아하였다. 언젠가 그가 하남의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유람할 때, 부구공(浮丘公)이라는 도사를 만나 그와 함께 숭산(嵩山)에 올라간 후, 그곳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후에 환량(桓良)이라는 사람이 마침내 산속에서 그를 찾아냈다. 그는 환량에게 “오는 7월 7일 구씨산(緱氏山)에서 만나자고 우리 집 사람들에게 전해주시오.”라고 하였다. 그 날이 되자 사람들이 구씨산으로 올라갔더니 과연 왕자교가 한 쌍의 백학을 타고 산 정상에 있었다. 그는 다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았다. 여러 차례 손을 흔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만 하는 듯했다. 며칠 후, 그는 다시 학을 타고 날아갔다. 사람들이 나중에 숭산에 사당을 짓고 그를 기렸다.
❍ 왕자교[王子喬] 태평광기(太平廣記) 제4권 신선(神仙)에 “왕자교는 주나라 영왕의 태자이다. 생황을 잘 불어 봉황의 울음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수와 낙수 사이를 노닐었는데 도사인 부구공이 그를 데리고 숭산에 올라 30여 년을 지냈다[王子喬者, 周靈王太子也. 好吹笙作鳳凰鳴. 游伊洛之間, 道士浮丘公, 接以上嵩山, 三十余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