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別二首[其一]증별2수1 / 헤어지며 주다
- 杜牧[두목] -
娉娉嫋嫋十三餘[빙빙뇨뇨십삼여] 하늘하늘 아리따운 열세 살 남짓
荳蔲梢頭二月初[두구초두이월초] 이월초순 가지 끝의 두구꽃 같네
春風十里揚州路[춘풍십리양주로] 봄바람 불어오는 양주 십리 거리
卷上珠簾總不如[권상주렴총불여] 주렴 걷고 봐도 다들 너만 못하네
<贈別二首一증별2수1 / 헤어지며 주다 / 杜牧두목>
❍ 증별[贈別] 작별의 정을 담은 시나 노래를 지어 주고 헤어짐. 떠나는 사람에게 정표(情表)로 시나 노래 따위를 지어 주면서 작별함. 헤어질 때 서로에게 물품이나 시문 등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이별의 시에는 송별(送別)‧증별(贈別)‧유별(留別)의 세 가지가 있다. 송별시는 이별에 임하여 시를 써서 멀리 떠나가는 이에게 주는 것이고, 증별시 역시 송별시와 마찬가지이다. 유별시는 송별시와는 반대로, 멀리 떠나는 사람이 전송하러 나온 사람에게 써서 주어 기념으로 삼게 하는 것이니 유증(留贈)이라 할 수도 있다.
❍ 두목[杜牧] 만당(晩唐)의 문장가이자 시인으로 자(字)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경조(京兆) 만년(萬年: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의 사족(士族) 출신이다. 고시(古詩)는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영향을 받아 사회와 정치에 관한 내용이 많다. 장편시는 필력이 웅장하고 장법(章法)이 엄정하며 감개가 깊다. 근체시(近體詩)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하였는데 서정적이며 풍경을 읊은 것이 많고, 격조가 청신(淸新)하고 감정이 완곡하고도 간명하다. 시어의 조탁(彫琢) 못지않게 내용을 중시했다. 병법에도 밝아 손자(孫子)에 주석을 내어 손자십가주(孫子十家註)에 들어 있다.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당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용병술을 논한 죄언(罪言)을 지어 황제에게 올린 바 있다.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황주(黃州), 지주(池州), 목주(睦州)에서 자사(刺史)를 지냈고, 사관수찬(史舘修撰)·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다. 중서성의 별칭이 자미성(紫微省)이었던 까닭에 사람들이 두자미(杜紫微)라고 불렀고, 사훈원외랑(司勛員外郞)을 지내서 두사훈(杜司勛)이라고도 불렀으며, 두보(杜甫)와 구별하기 위해 두보를 대두(大杜) 또는 노두(老杜)라고 하고 두목을 소두(小杜)라고 불렀고, 또 이상은(李商隱)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하여 소이두(小李杜)라고도 불렀는데 이백과 두보의 병칭인 이두(李杜)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안 남쪽 번천(樊川)에 있는 별장에서 지내게 된 만년에는 두번천(杜樊川)으로 불렸다. 두목은 당조(唐朝)에서 이름이 높은 경조두씨(京兆杜氏)로 서진(西晉)의 군사가인 두예(杜預)의 16세손이다. 두목과 두보는 같은 두예의 후예였지만 그 지파가 달랐는데, 두보는 두예의 아들 두탐(杜耽)의 후예였고, 두목은 두예의 다른 아들 두윤(杜尹)의 후예였다. 저작으로 번천문집(樊川文集) 20권이 있다.
❍ 빙빙[娉娉] 나긋나긋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가리킨다.
❍ 뇨뇨[嫋嫋] 뇨뇨(嬝嬝). 하늘거리다. 약하디 약함. 바람이 솔솔 부는 모양. 가늘고 길어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양. 裊裊(뇨뇨)로도 쓴다.
❍ 빙빙뇨뇨[娉娉嫋嫋] 아리땁고 낭창낭창한 모습이다.
❍ 두구[豆蔻] 파초 비슷하게 생긴 다년생 초본으로 초여름에 담황색 꽃을 피우고 향기가 있으며 열매는 향미(香味)가 있고 약용(藥用)으로 쓴다. 꽃이 피지 않았을 때는 함태화(含胎花)라고 부르며 나이 어린 아름다운 여자를 형용하는 말로 쓰였다. 이월초(二月初)는 두구(豆蔲)가 꽃봉오리인 상태로 아직 꽃을 피우기 전인데, 옛날에는 이것으로 성년이 못 된 여자아이를 비유하여 열서너 살의 여자를 두구년화(豆蔲年華)라고 불렀다.
❍ 두구[荳蔲] 두구는 육두구(肉荳蔲)라고도 하는 풀로, 엷은 황색 꽃이 피고 열매는 약용으로 쓰인다. 중국의 남방 사람들은 이 풀의 꽃이 활짝 피지 않고 봉오리만 맺혀 있는 것을 함태화(含胎花)라 하여 어린 처녀가 아기를 밴 것에 비유하는데, 이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 십리양주로[十里揚州路] 양주(揚州)의 창루가관(倡樓歌館)이 있던 곳을 가리키니, 곧 양주몽기(揚州夢記)에 이른바 구리삼십보가(九里三十步街)이다. 장호(張祜)의 억회남(憶淮南:揚州) 시에 “십 리 먼 길에 市井이 이어져 있네.[十里長街市井連]”라고 한 것도 여기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