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興八首[其二]추흥8수2 / 백제성 피리소리
- 杜甫[두보] -
夔府孤城落日斜[기부고성낙일사] 기주의 외로운 성에 지는 햇살 비끼면
每依北斗望京華[매의북두망경화] 매양 북두 의지해 장안 쪽을 바라보네
聽猿實下三聲淚[청원실하삼성루] 원숭이 세 울음에 절로 눈물 떨어지고
奉使虛隨八月槎[봉사허수팔월사] 사명 받들고 사신 뗏목 타지 못한 몸
畫省香爐違伏枕[화성향로위복침] 상서성 향로 떠나 베개에 엎드렸으니
山樓粉堞隱悲笳[산루분첩은비가] 백제성 성가퀴에 은은히 슬픈 피리소리
請看石上藤蘿月[청간석상등라월] 보게나 바위 위 등덩굴에 걸린 달이
已映洲前蘆荻花[이영주전로적화] 이미 모래톱 앞 갈대꽃 비추고 있다네
❍ 두보[杜甫]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두릉야로(杜陵野老), 두릉포의(杜陵布衣) 등이 있다. 양양(襄陽) 지방 출신으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40대인 천보(天寶) 14년(755년)에야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당시 장안에서 반군에게 잡혔다가 탈출, 숙종(肅宗)의 진영에 합류하여 좌습유(左拾遺)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낸 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두습유(杜拾遺), 두공부(杜工部) 등으로 불렀고, 또 장안성 밖 소릉(少陵)의 초당(草堂)에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두소릉(杜少陵), 두초당(杜草堂)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는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함께 이두(李杜)로 불렸는데,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隱)의 합칭인 소이두(小李杜)와 구별하기 위해 대이두(大李杜)라고도 부른다. 문학을 발판 삼아 벼슬로 나아가려던 그의 꿈이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짧은 한때를 빼고는 평생을 가난과 병으로 고생을 겪어야 했다. 중국의 서북 지역을 유랑하다가 결국 병사했다. 벼슬살이와 달리 문학, 특히 시에서 이룬 성취가 대단하였다. 남긴 시가 1500여 수에 달하며 작품집으로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 그 자신은 시성(詩聖)으로, 또 그의 시는 시사(詩史)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 정회[情懷] 가슴에 사무쳐 오는 정과 회포. 생각하는 정과 회포(懷抱).
❍ 기부고성[夔府孤城] 기부(夔府)는 기주(夔州)로, 백제성(白帝城)을 이른다.
❍ 북두[北斗] 북두칠성(北斗七星). 큰곰자리에서 가장 밝게 보이는 국자 모양으로 펼쳐있는 일곱 개의 별을 이른다. 첫째 별을 천추(天樞), 둘째 별을 선(琁), 셋째 별을 기(璣), 넷째 별을 권(權), 다섯째 별을 옥형(玉衡), 여섯째 별을 개양(開陽), 일곱째 별을 요광(搖光)이라 하는데, 첫째 별부터 넷째 별까지를 두괴(斗魁)라 하고, 다섯째에서 일곱째 별까지를 두병(斗柄)이라 한다.
❍ 경화[京華] 도성(都城)의 미칭(美稱)으로 여기서는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도성은 문물과 인재가 모여드는 곳이라는 뜻으로 생긴 호칭이다.
❍ 삼성루[三聲淚] 수경주(水經注) 강수주(江水注)에 실린 파동삼협가(巴東三峽歌)에 “파동 삼협에 무협이 긴데, 원숭이 울음 세 마디에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巴東三峽巫峽長 猿鳴三聲淚沾裳]”라는 구절이 있다. 무협(巫峽)은 장강삼협(長江三峽) 중의 하나로,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무산현(巫山縣) 동쪽에 있다. 무협 양쪽 언덕이 높고 험준하여 원숭이가 많이 서식하는데,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곳에서 항상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길게 들린다 한다. 삼협(三峽)은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을 이른다. 수경주(水經注)에서는 삼협을 광계협(廣溪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으로 기록하고 있다.
❍ 봉사[奉使] 사명(使命)을 받듦. 사신(使臣)이 되다. 봉사(奉使)는 왕명을 받들어 지방장관에게 사신(使臣)의 임무를 띠고 나다니는 사자를 말한다.
❍ 팔월사[八月槎] 진(晉) 나라 때 바닷가에 살던 한 사람이, 해마다 팔월이면 그 바닷가를 왕래하는 뗏목이 있어 한번은 그 뗏목을 타고 따라간 결과, 마침내 은하수(銀河水)에 다다라서 일월성신(日月星辰), 성곽(城郭), 옥사(屋舍) 등을 다 구경하고 견우(牽牛), 직녀(織女)까지 다 만나고 돌아왔다는 전설에서 온 말인데, 이 전설을 또한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서역(西域)에 나갔던 길에 떼를 타고 황하(黃河)의 근원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다가 한 성시(城市)에 이르러 견우, 직녀를 만나고 돌아왔다는 고사에 붙여 말하기도 하는 데서, 전하여 사행 길을 의미한다.
❍ 팔월사[八月槎] 매년 8월마다 은하수를 오간다고 하는 전설 속에 나오는 뗏목이다.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 제10권에 “근세에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살았다. 해마다 8월이면 어김없이 떼배[槎]가 오는 것을 보고 양식을 그 배에 싣고 열흘 남짓 가서 홀연히 한 곳에 이르니, 그곳에는 성곽과 가옥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부인이 베를 짜고 있었다. 한 남자가 소를 끌고 물가에 가서 물을 먹이다가 놀라며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가?’라고 묻자 그 사람이 ‘여기는 어느 곳인가?’라고 물었다. 소에 물을 먹이던 사람은 ‘그대가 촉에 이르거든 엄군평(嚴君平)을 찾아가 물어보라.’라고 하였다. 돌아와 엄군평에게 물으니 ‘모년 모월 모일에 객성(客星)이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을 범하더니 바로 이 사람이 은하수에 이르렀을 때였구나.’라고 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또, 한서(漢書) 권61 장건전(張騫傳)과 권96 서역전(西域傳)에 “장건이 서역에 사명을 받들어 갈 때 하수(河水)의 근원 끝까지 갔다.”라고 하였는데, 한나라 때 장건이 뗏목을 타고 먼 외국인 대하(大夏)로 사신 갔던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 화성향로[畫省香爐] 조정에서 벼슬하던 때를 비유한 말이다. 화성(畫省)은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으로, 상서성 안에 호분(胡粉)으로 벽을 바르고 옛날 현인과 열사를 그려놓았기 때문에 화성이라 한 것이다. 향로(香爐)는 상서랑이 입직할 때 급시사 두 사람이 향로를 잡고서 임금을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두보의 추흥팔수(秋興八首)에 “화성의 향로 멀리 떠나 침상에 엎드린 몸, 어둠에 파묻힌 성 누각엔 애달픈 피리 소리.[畫省香爐違伏枕, 山樓紛堞隱悲笳.]”라는 구절이 있다. 두보(杜甫)는 일찍이 상서원외랑을 지냈다.
❍ 복침[伏枕] 베개에 엎드림. 전하여 복침(伏枕)은 와병(臥病)을 이른다.
❍ 분첩[粉堞] 석회(石灰)를 바른 성가퀴. 석회를 바른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성첩(城堞). 성가퀴는 성(城) 위에 낮게 쌓은 담이다.
❍ 산루[山樓] 이 시에서는 백제성루(白帝城樓)를 이른다.
❍ 등라[藤蘿] 등나무의 덩굴. 담쟁이, 칡 등(等) 덩굴식물(植物)의 통틀어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