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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말로 형용하고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
- 장자(외편) 제22편 지북유[13]-
태청이 무궁에게 물었다. “당신은 도를 아십니까?” 무궁이 말했다. “알지 못합니다.” 다시 무위에게 물으니 무위가 말했다. “도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태청이 다시 물었다. “당신이 아는 도에는 법도라는 것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 법도는 어떻습니까?” “내가 아는 도는 귀해질 수도 있고 친해질 수도 있으며, 모여들 수도 있고 흩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도의 법도입니다.” 태청이 이 얘기를 듣고 무시에게 물었다. “무궁은 알지 못하였고, 무위는 알고 있었는데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입니까?” 무시가 말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 심오하고, 그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천박한 것입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내면적인 것이고 안다는 것은 외면적인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태청이 탄식하며 말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입니까? 안다는 것이 바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누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아는 것임을 알겠습니까?” 무시가 말했다. “도란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니 들은 것은 도가 아닙니다. 도란 볼 수 없는 것이니 본 것은 도가 아닙니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 말로 표현되었다면 도가 아닙니다. 형체를 지닌 물건들의 형체를 지니게 하는 것이 도임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도란 이름을 붙여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시가 다시 말했다. “누가 도에 대하여 물었을 때 그 물음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에 대하여 질문한 사람도 역시 참된 도에 대하여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란 물어서도 안 되는 것이며, 묻는다 하여 대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을 묻는 것은 헛된 질문입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대답하는 것은 진실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없이 헛된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은 밖으로는 우주의 현상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고, 안으로는 태초의 오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곤륜산 같은 고원한 경지에 가보지도 못하고 태허의 거침없는 세계에 노닐어 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 莊子(外篇) 第22篇 知北游[13]- 於是泰淸問乎无窮曰:「子知道乎?」 无窮曰:「吾不知.」 又問乎无爲. 無爲曰:「吾知道.」 曰:「子之知道, 亦有數乎?」 曰:「有.」 无爲曰:「吾知道之可以貴, 可以賤, 可以約, 可以散, 此吾所以知道之數也.」 泰淸以之言也問乎无始曰:「若是, 則无窮之弗知與无爲之知, 孰是而孰非乎?」 无始曰:「不知深矣, 知之淺矣. 弗知內矣, 知之外矣.」 於是泰淸中而歎曰:「弗知乃知乎! 知乃不知乎! 孰知不知之知?」 无始曰:「道不可聞, 聞而非也. 道不可見, 見而非也. 道不可言, 言而非也. 知形形之不形乎! 道不當名.」 无始曰:「有問道而應之者, 不知道也. 雖問道者, 亦未聞道. 道无問, 問无應. 无問問之, 是問窮也. 无應應之, 是无內也. 以无內待問窮, 若是者, 外不觀乎宇宙, 內不知乎大初, 是以不過乎崑崙, 不遊乎太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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