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격기적[鴻隙譏翟] 한서(漢書) 권84 적방진전(翟方進傳)에 “적방진이 승상이 되어서 여남(汝南)의 홍격파(鴻隙陂)를 허물도록 아뢰었으므로, 관개(灌漑)와 어별(魚鼈)의 다대한 이익을 받고 있던 고을 사람들이 무척이나 원망하였다.”라고 하였다.
♞ 홍경[弘景] 남북조(南北朝) 시대 양(梁) 나라의 은사. 남제 고제(南齊高帝) 때에 제왕(諸王)의 시독(侍讀)이 되었다가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한 뒤에는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하였으므로, 당시에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梁書 卷五十一>
♞ 홍경망[洪景望] 경망(景望)은 홍방(洪雱)의 자(字)이다.
♞ 홍경비[弘慶碑] 고려 현종(顯宗)이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을 시켜 절을 짓게 하고 이름을 봉선홍경사라 내리는 동시에 비를 세워 한림학사 최충(崔冲)을 명하여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비만 남았다. 백광훈(白光勳)의 “秋草前朝事 殘碑學士文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이라는 시가 있음.
♞ 홍경사[弘慶寺] 고려 추숭왕(追崇王) 안종(安宗)의 원당(願堂)이다.
♞ 홍경사비[弘慶寺碑] 고려 현종(顯宗)이 직산(稷山) 북쪽 15리 지점에 승려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사찰을 건립하게 하고, 병부 상서 강민첨(姜民瞻) 등에게 감독을 명하여 2백여 칸의 거찰(巨刹)을 세우게 한 뒤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의 이름을 내렸는데, 그 뒤 절은 없어지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이 글을 지은 비석만 남아 있게 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6 稷山縣>
♞ 홍계통[洪季通] 계통(季通)은 홍명형(洪命亨)의 자(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