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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순【崔甫淳】고려때 사람. 벼슬은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최북【崔北】영조(英祖) 때의 화가(畫家). 자는 성기(聖器)ㆍ유용(有用), 호는 성재(星齋)ㆍ기암(箕庵)ㆍ거기재(居其齋)ㆍ삼기재(三奇齋)ㆍ호생관(毫生館), 본관은 무주(茂朱)인데, 그의 이름자인 북(北)자를 파자(破字)하여 최칠칠(崔七七)로 불렸다 한다. 최성지【崔聖止】성지는 최유연(崔有淵)의 자(字)이다. 최시우【催詩雨】두보(杜甫)의 시에 “조각 구름이 머리 위에 모여드니[片雲頭上黑] 알겠노라 비로 시를 재촉하려는 줄을[知是雨催詩]" 하였다. 최식【崔寔】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 자진(子眞). 환제(桓帝) 때 낭(郞)이 되어 당시 시행하여야 될 수십 조를 적은 정론(政論)을 바쳤음. 최언명【崔彦明】언명은 최황(崔滉)의 자이다. 최융【崔融】최융은 당 나라 문장가로 자는 안성(安城)이었는데, 문장이 뛰어나 봉각 사인(鳳閣舍人)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중요한 문자를 모두 다루었다.《新唐書 李賀傳ㆍ崔融傳》 최자겸【崔子謙】자겸(子謙)은 최명길(崔鳴吉)의 자(字)이다. 최자적【崔子迪】자적(子迪)은 최명길(崔鳴吉)의 동생 혜길(惠吉)의 자(字)이다. 최장【催粧】최장은 장가드는 것을 이름. 몽화록(夢華錄)에 “무릇 장가들 때에는 혼인 하루 앞서 신부에게 단장을 재촉하는 뜻으로 관피(冠帔)와 화분(花盆)을 보낸다.” 하였음. 그리고 당 나라 사람이 성혼하는 저녁에는 최장시가 있으므로 육창(陸敞)이 운안공주(雲安公主)를 위하여 최장시를 지었음. 최전【崔澱】조선조 명종~선조 연간의 문인(文人). 율곡(栗谷)의 문인으로 시ㆍ서ㆍ화(詩書畵)에 모두 능했으며 저서로 양포유고(楊浦遺稿)가 있음. 최제수인【榱題數仞】고대 광실(高臺廣室)의 뜻으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최제는 집 서까래머리라는 뜻으로 맹자(孟子) 진심 하에 “당(堂)의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고 서까래머리가 두어 자나 나오는 것을, 나는 뜻을 얻더라도 하지 않겠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최졸옹【崔拙翁】졸옹은 최해(崔瀣)의 호.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고도 한다. 최중령【崔中令】최충(崔冲). 그는 현종(顯宗) 때로부터 문종(文宗) 때까지 문(文)ㆍ무(武)의 큰 공으로 중서문하성령(中書門下省令)이 되고, 아들 유선(惟善)이 중서령(中書令), 유길(惟吉)은 상서령(尙書令)이 되어, 왕이 베푸는 국로연(國老宴)에 두 아들이 아버지를 부액(扶掖)하고 참예하니, 희한한 성사(聖事)라 일렀다. 《高麗史 崔冲傳》 최최【崔崔】산이 우뚝하게 높은 모양, 높고 큰 모양 최해【崔瀣】경주인(慶州人)인데 자는 언명(彦明)이고 호는 졸옹(拙翁)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8년에 원(元)의 제과(諸科)에 합격하여 개주 판관(蓋州判官)에 제수되었는데 병을 칭탁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이 되었음. 이지현의 폐흥(廢興)의 전말을 기록한 비문을 지었음. 최해주【崔海州】광해군 8년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으면서 이른바 ‘해주옥(海州獄)’을 다스렸던 최기(崔沂)를 말한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과 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하여 이이첨의 미움을 받은 나머지 남형죄(濫刑罪)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옥사(獄死)했으며, 뒤에 다시 대역죄(大逆罪)로 몰려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면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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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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