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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묘【淸廟】시경(詩經) 주송(周頌)의 편명(篇名)으로, 주공(周公)이 문왕(文王)의 사당에 제사할 때 드린 시(詩)이기도 하다. 청묘【淸廟】청묘는 종묘(宗廟) 혹은 그곳에서 연주하는 악장(樂章)을 가리킨다. 황종은 12율(律) 가운데 양률(陽律)에 속하는 여섯 종류의 율 중 첫 번째 율이고, 대려는 여섯 음률(陰律) 중 네 번째 율로서, 음악이나 시문이 장엄하고 정대한 것을 비유할 때 곧잘 병칭해서 쓴다. 청묘【淸廟】청정(淸淨)한 사당이란 뜻으로 태묘(太廟) 즉 종묘(宗廟)를 말한다. 시경(詩經) 주송(周頌)에 “아, 심원한 청묘, 엄숙하고 화평하며 밝은 공경과 제후이다.[於穆淸廟 肅雝顯相]" 하였는데, 이는 주공(周公)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왕에게 제사드린 시이다. 청묘슬【淸廟瑟】시경(詩經) 주송(周頌)의 청묘(淸廟) 시에 가락을 맞춘 비파인데, 줄은 굵고 줄구멍이 넓어서 여운(餘韻)이 길다. 《禮記 樂記》 청묘슬【淸廟瑟】청묘는 주 문왕(周文王)의 종묘(宗廟)이므로 즉 문왕의 덕을 찬미한 아악(雅樂)을 뜻한다. 청묘현【淸廟絃】시경(詩經) 주송(周頌) 청묘시(淸廟詩)에 가락을 맞춘 비파로 줄이 굵고 구멍이 넓어서 여운이 길다. 《禮記 樂記》 청문【靑門】백악천시후집(白樂天詩後集) 권10 권주14수(勸酒十四首)의 “어디서도 술 잊긴 어려운건데 청문에서 송별이 많기도 하네[何處難忘酒 靑門送別多].”에서 나온 것으로, 한(漢) 나라 장안성(長安城)의 동남문의 이름인데 서울의 성문을 뜻한다. 청문【靑門】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으로, 도성의 동쪽 문을 말한다. 청문과【靑門瓜】한(漢) 나라 때 은자(隱者) 소평(邵平)이 청문(靑門) 밖에 심었던 오이를 말하는데, 이를 동릉과(東陵瓜)라고도 한다. 청문과지【靑門瓜地】진(秦) 나라 때 소평(召平)이 동릉후(東陵侯)를 지내다가 진 나라가 망하자 평민이 되어 장안성(長安城)의 청문 밖에 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함. 청문노방류【靑門路傍柳】옛날 장안(長安) 동남쪽의 문 색깔이 파랗기 때문에 청문(靑門) 혹은 청성문(靑城門)이라고 불렀는데, 송별하는 사람들이 청문 밖 패교(覇橋)까지 와서 그곳의 버들가지를 꺾어 작별의 정표로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三輔黃圖 橋》 청문무금적【靑門撫金狄】동한(東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계자훈(薊子訓)이라는 선인(仙人)이 장안(長安) 동문 밖에서 진시황(秦始皇) 때 만들어진 적인 동상(狄人銅像)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당시에 이 동상을 만드는 것을 본 뒤로 벌써 5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청문연류【靑門煙柳】당 나라 이상은(李商隱)이 지은 시 ‘낙유원(樂遊原)’의 “청문 밖엔 연류가 하늘거리고 자각에는 운송이 춤을 추누나[靑門弄煙柳 紫閣舞雲松]" 에서 나온 것으로, 청문은 한(漢)나라 장안성(長安城)의 동남문인데 우리나라의 도성문을 가리키고, 연류는 수양버들을 먼 곳에서 바라볼 때 안개처럼 보인다 하여 생긴 말이다. 청문종과【靑門種瓜】청문은 한(漢) 나라 장안성(張安城) 동남쪽에 있던 문 이름인데, 진(秦) 나라 동릉후(東陵侯) 소평(邵平)이 진 나라가 망한 뒤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여기에서 오이를 심어 가꾸며 살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청문학고후【靑門學故侯】청문은 한 나라 장안성(長安城)의 동남쪽에 있는 문을 말하고, 고후(故侯)는 옛 진(秦) 나라 때의 동릉후(東陵侯) 소평(邵平)을 이르는데, 동릉후 소평이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포의(布衣)가 되어 장안성의 청문 밖에 오이를 재배하면서 여생을 보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청문과(靑門瓜) 또는 동릉과(東陵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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