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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양【七襄】직녀가 하루 낮 동안에 일곱 번 베틀을 옮겨서 베를 짠다고 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삼각으로 있는 저 직녀성은 종일토록 일곱 번 자리 바꾸네.[跂彼織女 終日七襄]”하였다. 칠언래화백량대【七言來和柏梁臺】한 무제(漢武帝)가 백량대(柏梁臺)를 낙성(落成)할 때에 군신(群臣)을 모아 놓고 모두 운(韻)을 붙여 칠언 연구(七言聯句)를 짓게 했던바, 여기에는 집금오(執金吾)인 중위표(中尉豹)도 끼어 있었다. 칠언삼첩【七言三疊】황정경(黃庭經)에 “閒居蕊州作七言 琴心三疊舞胎仙" 이란 글귀가 있음. 칠역【七繹】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北岳生剗 迹埋名身 聞事盡道畜山扁 東國進士謬與薦焉……” 칠엽초【七葉貂】칠엽은 칠대(七代)와 같고, 초는 담비꼬리인데 한(漢) 나라 때 시중(侍中)과 중상시(中常侍)가 쓰는 무변(武弁)에 담비꼬리를 꽂았다 하여 고관이 쓰는 관을 가리킨다.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한 나라에 귀화했던 김일제(金日磾)가 무제의 사랑을 받아 시중(侍中)을 지냈는데, 자기 자손이 7대까지 계속 시중을 지내 부귀를 누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六十八 金日磾傳》 칠엽초선【七葉貂蟬】칠대의 고관. 한(漢) 나라 때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의 두 집안이 7대 동안 천자(天子)의 좌우에서 천자를 보좌하면서 큰 총영(寵榮)을 누렸던 데서 온 말이다. 칠옹【漆翁】장자(莊子)의 별칭으로 일찍이 칠원리(漆園吏)를 지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장자는 기심(機心)을 잊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칠요【七要】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松旣烟而接漢 竹緣嶺而負筠 哀過鴻於月曉 悲夜猿於霜旻 乃鶴駕之非遠 信羽車之可憐……” 칠요【七曜】일(日)ㆍ월(月)과 수성(水星)ㆍ화성(火星)ㆍ목성(木星)ㆍ금성(金星)ㆍ토성(土星)을 말한다. 낮과 밤, 그리고 계절에 따라 그 운행이 수시로 바뀐다. 칠원【漆園】전국 시대의 사상가인 장주(莊周)가 일찍이 몽(蒙)이란 땅에서 칠원 리(漆園吏)로 있었으므로, 장주 또는 그의 저술인 장자(莊子)를 보통 칠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칠원리【漆園吏】장자(莊子)를 말한다. 장자가 일찍이 몽(蒙)이란 땅에서 칠원(漆園 옻나무를 심는 밭)의 벼슬아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史記 老莊傳》 칠원선리회조궤【漆園仙吏恢弔詭】칠원의 선리(仙吏)는 곧 일찍이 몽(蒙)이란 땅에서 칠원의 벼슬아치를 지낸 장주(莊周)를 높여 이른 말인데,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공자도 그대와 함께 모두 꿈을 꾸고 있다. 또 그대에게 꿈을 꾼다고 말하는 나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런 말을 일러 ‘지극히 의문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칠월편【七月篇】시경(詩經) 빈풍(豳風)의 편명이다. 주(周) 나라 시조(始祖)인 농관(農官) 후직(后稷)의 증손자가 되는 공류(公劉)가 처음 빈(豳) 땅에 나라를 세우고 자기 조상인 후직을 본받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니, 백성들이 모두 잘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공류의 13대손인 무왕(武王)이 돌아가고 그이 아들 성왕(成王)이 즉위하여서는 나이가 어린 탓으로 선조의 사업을 계승하지 못함으로써 백성들이 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 시는 그 당시 성왕의 숙부(叔父)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면서, 옛날 농사를 장려하여 나라의 부강(富强)을 일삼던 선조 후직과 공류의 풍화(風化)를 진술하여 성왕으로 하여금 잊지 말도록 노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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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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