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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荊州】형주는 당 현종(唐玄宗) 때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낸 한조종(韓朝宗)인데, 평소에 숨은 인재를 발탁하길 좋아하여 최종지(崔宗之)ㆍ엄무(嚴武) 등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그의 인정을 받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이백(李白)의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평생에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지기보다는 한형주가 한번 알아주기를 원할 뿐이다.[生不用封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라고 하였다. 형주【荊州】호남성(湖南省) 형주고사【荊州古事】형주(荊州)의 고사란 곧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선주(先主)가 위(魏) 나라 조조(曹操)의 공격을 받아 쫓겨서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에게 가 의지하고 있었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三國志 卷三十二》 형주면【荊州面】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 한조종(韓朝宗)을 말한다.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에 이백(李白)이 글을 올려 이르기를 “살아서 만호후 봉함이 필요치 않고, 다만 한 형주를 한 번만이라도 보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古文眞寶 卷二 與韓荊州書》 형주하행득신조【荊州何幸得身遭】당(唐) 나라 한조종(韓朝宗)이 형주 장사(荊州長史)로서 후배들을 잘 이끌어 주어 사인(士人)의 추앙를 받았는데, 이백(李白)이 그에게 보낸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이 세상에 태어나 만호후가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그저 한형주를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生不用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고 사람들이 이야기한다.”는 글이 실려 있다. 형창【螢窓】형창은 진(晉) 나라 때 차윤(車胤)이 밤에 개똥불을 모아서 그 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으며 고학(苦學)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서재를 말하기도 한다. 형창설안【螢窓雪案】중국 진(晉)나라 차윤(車胤)이 반딧불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이 눈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 갖은 고생을 하며 꾸준히 학문을 닦은 공을 이름. 형처【荊妻】남에게 자기 아내를 낮추어 일컫는 말. 형초【荊楚】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형피수돈【形疲瘦頓】몸이 피곤하고, 마르고 초췌하다. 형해구이망【形骸久已忘】우정(友情)이 매우 친밀하여 자기의 형체도 잊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을 말한다. 형해득실【形骸得失】형해를 벗어나는 것은 불교의 유심론(唯心論)의 진리를, 득실을 하나로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도(道)의 본체에서 보면 하나같이 같다는 노장(老莊)의 설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형해자소혜중산【形骸自笑嵇中散】육신에 대한 집착을 멀리 떠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혜 중산은 진(晉) 나라 때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임명되었던 혜강(嵇康)으로, 일찍이 양생론(養生論)을 지었으며 직접 연단(鍊丹)을 하기도 하였다. 《晉書 卷49》 형형【泂泂】물이 맑고 깊은 모양 형혹【熒惑】화성(火星)의 별칭. 하늘의 법성(法星)으로 이 별이 나타나면 재화와 병란(兵亂)이 뒤따른다 한다. 춘추위(春秋緯)에 “적제(赤帝)의 신(神)이 형혹이 되어 남방에 위치한다.” 하였다. 화신(火神). 형화【荊花】형제를 비유한 말이다. 옛날 전진(田眞)의 형제 3인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고 나니, 오직 자형수(紫荊樹) 한 그루만 남았으므로, 이것을 셋으로 쪼개서 나누자고 의논하고서 다음 날 그 나무를 베러 가보니, 나무가 이미 말라 버렸다. 그래서 전진이 크게 놀라 아우들에게 말하기를, “이 나무의 뿌리가 하나인지라, 장차 쪼개 나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마른 것이니, 우리는 나무만도 못하다.” 하고는, 나누었던 재산을 다시 합하여 형제간에 아주 화목하게 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續齊諧記 紫荊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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