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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계회종리지서【活計會從犂地鼠】두더지는 땅을 마치 쟁기질하듯 뒤지는 것이므로, 전하여 농사지어 먹고사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활락도【豁落圖】몸을 수양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도서(道書)를 말함. 활연【豁然】문득, 갑자기. 활인원【活人院】전에 벼슬하던 문사(文士)로서 승문원(承文院)에 들어와 학관(學官)이 되었다가 이로 말미암아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된 사람이 많으므로, 사람을 다시 살리는 곳이라 하여 승문원의 별명이 된 말이다. 활활【滑滑】진흙이 미끄러운 모양 활활【活活】“활활”은 틀린 독음, 올바른 독음과 뜻은 “괄괄 물이 기운차게 흐르는 소리, 미끄러운 것, 진창을 걷는 일”임. 황【簧】피리 등의 악기의 얇은 떨림판, 즉 리드(reed)이다. 혀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보통 갈대로 만든다. 황각【黃閣】한대(漢代)에 승상(丞相)이 나라 일을 보던 곳을 황각이라 불렀는데, 그곳 문을 누런 색으로 칠했었기 때문이다. 당(唐) 나라 때에는 문하성(門下省)도 황각이라 불렀다. 자각(雌閣)이라고도 하는 것은 옛날엔 노란 칠을 흔히 자황(雌黃)으로써 했기 때문이다. 황각조갱【黃閣調羹】의정부(議政府)에서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황각은 의정부의 별칭이고, 국을 끓인다는 것은 재상이 국가의 일을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말로,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 “만약 국을 끓일 경우에는 너를 소금과 매실로 삼겠다.” 하였다. 황간【黃幹】황간은 주희(朱熹)의 사위이며 고제(高弟)로서 호는 면재(勉齋)이다. 주희가 일찍이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가 상례(喪禮)ㆍ제례(祭禮) 두 편을 황간에게 맡겨 이를 완성하게 하였으며, 임종시에 그에게 도통(道統)을 전했다. 《宋史 卷四百三十》 황감【黃甘】황감은 황감(黃柑)과 같은 것으로 밀감임. 황감동정【黃柑洞庭】감자[柑]는 동정(洞庭)에서 나는 것이 유명하다. 황감저작【黃甘抵鵲】중원(中原)에서는 귀중히 여기는 것을 변방에서는 천히 여긴다는 뜻으로 곤산(昆山)의 곁에서는 옥이 흔한 때문에 옥박(玉璞)을 까마귀나 까치에게 던져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황갑【黃甲】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 급제한 사람을 이름. 갑과 급제자의 명단(名單)은 특히 황지(黃紙)에 썼던 데서 온 말이다. 황강【黃崗】일명 황강(黃岡)으로, 유배지(流配地)를 뜻하는 말이다. 송(宋)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5년(1082) 즉 ‘적벽부(赤壁賦)’를 짓게 된 임술년(壬戌年)에 소동파(蘇東坡)가 그곳으로 귀양을 갔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황강【黃岡】황주(黃州)의 별칭이다. 황강고사【黃崗故事】송(宋)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연간에 소동파(蘇東坡)가 황강(黃崗)에 귀양갔을 때 그의 아우 자유(子由)도 균주(筠州)로 좌천되어 내려왔으므로 오랜만에 해후하여 함께 노닌 고사가 있는데, 소동파의 ‘감구시(感舊詩)’ 서문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蘇東坡詩集 卷33》 황강유편【黃崗遺篇】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를 가리킨다. 황주(黃州)에 유배된 그가 송(宋)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5년(1082) 즉 임술년에 양세창(楊世昌)과 함께 적벽(赤壁)에서 두 차례 뱃놀이를 하고 나서 그 감회를 전(前)ㆍ후(後)의 두 적벽부로 써내었다. 황강(黃崗)은 보통 황강(黃岡)이라고 하는데 바로 황주(黃州)를 뜻한다. 황강적【黃岡跡】황강은 호북성(湖北省) 황강산(黃岡山) 동쪽에 있는 황니판(黃泥坂)을 말한 것으로,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두 손이 나를 따라 황니의 판을 지났다.[二客從予 過黃泥之坂]" 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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