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홍경【弘景】남북조(南北朝) 시대 양(梁) 나라의 은사. 남제 고제(南齊高帝) 때에 제왕(諸王)의 시독(侍讀)이 되었다가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한 뒤에는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하였으므로, 당시에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梁書 卷五十一》 홍경망【洪景望】경망(景望)은 홍방(洪雱)의 자(字)이다. 홍경비【弘慶碑】고려 현종(顯宗)이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을 시켜 절을 짓게 하고 이름을 봉선홍경사라 내리는 동시에 비를 세워 한림학사 최충(崔冲)을 명하여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비만 남았음. 백광훈(白光勳)의 “秋草前朝事 殘碑學士文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 이라는 시가 있음. 홍경사【弘慶寺】고려 추숭왕(追崇王) 안종(安宗)의 원당(願堂). 홍경사비【弘慶寺碑】고려 현종(顯宗)이 직산(稷山) 북쪽 15리 지점에 승려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사찰을 건립하게 하고, 병부 상서 강민첨(姜民瞻) 등에게 감독을 명하여 2백여 칸의 거찰(巨刹)을 세우게 한 뒤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의 이름을 내렸는데, 그 뒤 절은 없어지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이 글을 지은 비석만 남아 있게 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6 稷山縣》 홍계통【洪季通】계통(季通)은 홍명형(洪命亨)의 자(字)이다. 홍곡【鴻鵠】맹자(孟子) 고자(告子) 상편에, “두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치는데, 한 사람은 전심치지(專心致志)하여 혁추(奕秋)의 시키는 것만 듣고, 한 사람은 홍곡(鴻鵠)이 날아온다면 활을 당겨서 쏠 것만 생각한다.” 하였다. 마음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비유. 홍곡영렴연작기【鴻鵠寧嬚燕雀欺】훌륭한 사람은 못난 사람의 업신여김을 개의치 않음을 비유한 말. 연작은 제비나 참새 따위의 작은 새이며 홍곡(鴻鵠)은 큰 새이다. 옛날 진승(陳勝)은 자기의 뜻을 몰라주는 사람에게 “연작이 어떻게 홍곡의 뜻을 알겠는가?[燕雀安知鴻鵠之志哉]" 하였다. 《漢書 卷三十一 陳勝傳》 홍관일【虹貫日】이른바 백홍관일(白虹貫日)의 흉조(凶兆)를 말한다. 흰 무지개는 병란(兵亂)을 상징하고 해는 임금 즉 국가를 상징한다. 홍교【虹橋】홍교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다리로 이 지역은 옛날 초(楚) 나라의 땅이었다. 홍교【虹橋】홍교는 무지개 모양처럼 굽은 다리. 또는 무지개 다리로 신선들이 다니는 다리이다. 홍군【紅裙】붉은 치마, 즉 기녀(妓女)를 지칭하는 말이다. 홍기【紅旗】작전용 군기(軍旗)를 말한다. 홍노【洪爐】큰 용광로로, 만물을 생성하는 본원(本源)을 말한다. 홍농도하【弘農渡河】태수가 선정을 하여 호랑이가 강을 건너 피해감. 진(晉)의 유곤(劉琨)이 홍농 태수(弘農太守)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호랑이가 새끼를 업고 그를 피해 황하를 건너갔다고 함. 《淵鑑類函》 홍니【紅泥】붉은 찰흙. 한(漢)나라 때 황제가 내리는 조서는 붉은 찰흙으로 봉함을 하였다 하여 흔히 왕이 내리는 글을 뜻한다. 홍니【鴻泥】홍니는 설리홍조(雪裏鴻爪)의 약칭인데 행종(行蹤)이 정처 없이 우연히 서로 만난 것을 이름. 소식의 화자유민지회구시(和子由澠池懷舊詩)에 “人生到處知何事 應是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라 하였음. 홍당【哄堂】어사대의 관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한꺼번에 떠들썩하게 웃는 것을 말한다. 홍대【紅帶】고려 때 4품 이상의 문관(文官)이 띠던 띠로 정대를 말한다.
10/20/30/40/50/60/70/80/90/100/10/20/30/40/50/60
|
|
|
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
|
|
|
Copyright (c) 2000 by Ansg All rights reserved <돌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