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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箕子】기자는 은(殷) 주(紂)의 숙부로서 무도한 주를 자주 간하다가 잡히어 종이 되었고, 은 나라가 망한 뒤에는 조선(朝鮮)에 도망하여 기자 조선을 세웠다고 한다. 기자【箕子】殷나라의 太師. 주왕의 숙부로서 주왕을 자주 간하다가 잡혀 종이 됨. 은나라가 망한 후 조선에 도망하여 기자 조선을 창업하였다 함. 기자【驥子】재질이 뛰어난 청년을 말함. 《北史》 卷三十八 裵延儁傳에 “연준(延儁)의 종형 선명(宣明)의 두 아들 경란(景鸞)ㆍ경홍(景鴻)이 특이한 재질을 지녀 하동(河東)에서 경란은 기자(驥子)로 부르고 경홍은 용문(龍文)으로 불렀다.” 하였음. 기자국【箕子國】기자(箕子)는 은(殷) 나라 주왕(紂王)의 숙부로서, 은 나라가 망한 뒤 주(周) 나라 무왕(武王)으로부터 조선(朝鮮)에 봉함을 받고 들어와 예의ㆍ전잠(田蠶)ㆍ방직을 가르치고 팔조 법금을 행하였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기자 동래설(箕子東來說)을 부정하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현재 팔조 법금의 내용 모두가 알려지지 않고 오직 살인, 상해(傷害), 투도(偸盜)만이 전해지고 있다. 《史記 卷3ㆍ燃藜室記述 別集 卷19 歷代典故 箕子朝鮮》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기자는 주왕의 횡포를 피하여, 혹은 주나라 무왕이 조선왕으로 책봉함에 따라 조선에 들어와 예의‧밭갈이‧누에치기‧베짜기와 사회 교화(敎化)를 위한 팔조지교(八條之敎)를 가르쳤다고 하나 이는 후세 사람들에 의한 조작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라고 함. 왜냐하면 진(晉)나라의 무장(武將)‧정치가‧학자인 두예(杜預)가 그의 저서 춘추석례(春秋釋例)의 주(註)에서 “기자의 무덤이 양(梁)나라의 몽현(夢縣)에 있다”고 적고 있는 만큼 ‘기자 동래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임. 기자불신【箕子不臣】주 무왕(周武王)은 은 주(殷紂)의 숙부요, 태랑(太郞)인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여, 신하로 삼지 않는 우우(優遇)를 했다 한다. 기자사【箕子祠】기자사는 평양(平壤)에 있는 기자(箕子)를 모신 사당이다. 기자산【棄子山】고구려 때의 산 이름. 전쟁에 나갔던 아들이 싸움에 지고 돌아오면 이 산에 버렸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기자위인노오【箕子爲人奴】기자는 은(殷) 나라의 태사(太師)이며 주왕(紂王)의 숙부로서 주왕의 비행을 자주 간하여도 듣지 않자, 거짓 미친 체하여 종이 되었다. 《史記 殷紀》 기자조【箕子操】금곡(琴曲)의 이름으로, 은(殷) 나라 기자(箕子)가 주(紂)의 음일(淫泆)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거짓 미친 체하여 종이 되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슬퍼하여 거문고를 타서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기장【奇章】기장은 수(隋) 나라 때 기장군공(奇章郡公)에 봉해진 우홍(牛弘)을 가리키는데, 우홍이 평소 기암괴석(奇巖怪石) 모으는 일을 취미로 삼았다. 백거이(白居易)의 태호석기(太湖石記)에 “옛날 달인(達人)들은 모두 특별히 즐긴 것이 있다. 현안선생(玄晏先生)은 글을 즐겼고, 혜중산(嵇仲散)은 거문고를 즐겼고, 도정절(陶靖節)은 술을 즐겼고, 승상(丞相) 기장공(奇章公)은 돌을 즐겼다.” 하였다. 기장【奇章】수(隋)의 우홍(牛弘)이 본 성씨는 요(▣)였는데, 사성(賜姓)을 우(牛)로 받고, 뒤에 기장군공(奇章郡公)에 봉해졌으므로 우씨의 시조가 기장공이라 하여 우(牛)를 기장(奇章)이라고 하였음. 기장지무【旣張之舞】이미 벌린 춤이란 뜻으로 이미 시작한 일이므로 중간에 그만 둘 수 없다는 말. 기재【奇才】뛰어난 재주. 기재【企齋】신광한(申光漢)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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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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