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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費誓】비는 서경(書經) 비서편(費誓篇)에 나오는 지명. 노후(魯侯)가 서융(徐戎)과 회이(淮夷)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모아 놓고 훈시한 곳이다. 비서감【祕書監】경적(經籍), 도서(圖書), 저작(著作) 등의 일을 관장하는 비서성(祕書省)의 장관을 말하는데, 이태백(李太白)을 처음 만나 보고 나서 바로 적선(謫仙)이라고 찬탄하며 자신의 관인(官印)을 끌러 술값을 치르면서 함께 통음(痛飮)했던 당(唐) 나라의 비서감 하지장(賀知章)을 가리키기도 한다. 비석【飛錫】승려가 거처할 곳을 얻어 머무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응진이 석장(錫杖)을 날려 몸을 싣고서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躡虛]”라는 말이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석【飛舃】후한(後漢) 때 왕교(王喬)가 섭현령(葉縣令)이 되어 그 먼 곳에서 매월 삭망(朔望) 때마다 반드시 조회를 오므로, 임금이 그가 거기(車騎)도 없이 자주 오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가 오는 것을 바라보게 하였는데, 그가 올 때에 오리 두 마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오자 그물을 쳐서 그것을 잡아 놓고 보니 신 한 짝만이 걸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方術傳》 비석나한【飛錫羅漢】서천(西天)의 도승(道僧)이 흔히 석장(錫杖)을 날려 왕래했다 한다. 중국의 고승(高僧) 은봉(隱峯)도 오대(五臺)에 놀 때에 회서(淮西)에 나와 석장을 던지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며, 신라(新羅) 때에도 양지(良志)가 만든 석장이 절로 날아 단월(檀越)의 집마다 다니며 쩔렁쩔렁했다 한다. 비석자능선야학【飛錫自能先野鶴】양(梁) 나라 무제(武帝) 때 승(僧)과 도사(道士)가 한 도량(道場)을 놓고 서로 다투자, 무제가 말하기를, “먼저 그곳에 도달하는 자가 그것을 차지하라.” 하였다. 이에 도사가 백학(白鶴)으로 화해 먼저 소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잠시 뒤에 허공을 뚫고 지팡이가 날아왔는데, 그 소리가 골짜기를 울리었는바, 바로 승이 던진 지팡이였다. 그러자 백학이 놀라서 달아나 드디어 승이 도량을 얻었다. 비석지심【匪石之心】돌과 같이 자유로이 구르지 않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확고불발(確固不拔)한 절조(節操)가 굳은 마음의 의미. 비성비현【非聖非賢】“술꾼이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 한다.” 하였다. 《鮮于輔의 말》 비성여뢰【沸聲如雷】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다는 뜻으로,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가 우레와 같이 심하듯이 전쟁의 참상을 비유하는 말. 비소【誹笑】비웃는 웃음 비슬산【琵瑟山】현풍현(玄風縣) 동쪽의 비슬산인데 옛 이름은 걸산(乞山)이다. 《輿地勝覽》 비승비속【非僧非俗】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뜻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 한 얼치기를 비유하는 말. 반승반속(半僧半俗) 비실【篚實】옥백(玉帛)을 담는 광주리. 비심【裨諶】춘추 시대 정(鄭) 나라의 대부(大夫). 문안을 창안해 내는 슬기가 있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외교 문서를 만듦에 비심이 초안을 작성하고……" 하였다. 비심【裨諶】춘추 시대 정(鄭) 나라의 대부(大夫)인데, 그는 꾀를 내는 데에 유능했으되, 반드시 초야로 내려가야만 좋은 꾀가 나왔으므로, 외교(外交) 관계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는 반드시 초야로 가서 그 일에 대한 가부를 꾀하게 했다 한다. 《左傳 襄公三十一年》 비심【裨諶】춘추 시대(春秋時代) 모사(謀事)에 능했던 사람. 그런데 그의 모사도 교외에서는 잘 맞았지만 성내에서는 잘 맞지 않았다 한다. 《淮南子 說林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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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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