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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삭육마【朽索六馬】몹시 위태로운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만백성을 대함에 썩은 고삐로 여섯 마리 말을 몰듯이 두려움을 느낀다.” 하였다. 후산【侯狦】한(漢) 나라 때의 흉노(匈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이름인 계후산(稽侯狦)의 준말이다. 후삼만호【侯三萬戶】한나라의 장량이 유방(劉邦)을 도와 항우(項羽)를 쳐서 천하를 통일하는 공을 세우고서도 명철보신(明哲保身)하여 3만 호 되는 유후(留侯)로 봉해진 것을 말한다. 《史記 卷五十五 留侯世家》 후색【朽索】서경(書經)에 “내가 만백성에 임함에 송구함이 썩은 밧줄로 여섯 말[馬]을 제어함 같다[予臨非民 懍乎若朽索之馭六馬].” 하였다. 후생【侯生】한(漢) 나라의 저명한 학자 양웅의 제자인 후파(侯芭)를 말한다. 후생【侯生】후생은 진시황 때의 방사이다. 진 시황의 명을 받아 같은 방사인 석생(石生) 등과 함께 선인(仙人)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간 적이 있었다. 후생가외【後生可畏】후생은 뒤에 태어난 사람, 후배, 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후생은 두려워할 만함. 후배는 선배들보다 나아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후배가 나이 40~50이 되어도 세상에 이렇다 할 명성이 알려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별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 《論語 第9篇 子罕 22章》 후생입도사【侯生入屠肆】전국(戰國) 시대 신릉군은 위(魏)나라 공자(公子)인데, 성문(城門)에 문지기 노릇하는 후생(侯生)이란 노인이 어진 사람이란 말을 듣고, 연회(宴會)에 초대하기 위하여 신릉군이 친히 영접하러 가서 수레에 태우고 오는데, 중도에서 후생이, “내가 친한 사람 주해(朱亥)라 하는 자가 백정들 가운데 있는데 잠깐 같이 들러서 갑시다.” 하고 신릉군이 수레를 끌고 그리로 갔다. 후생은 그 사람과 일부러 오랫동안 서서 이야기하니 같이 간 하인들이 모두 후생을 가만히 욕하였다. 그러나 신릉군은 말고삐를 잡고 더욱 공손하였다. 후일에 마침내 후생과 주해의 도움으로 조(趙)나라를 구(救)하는 공을 이루었다. 후설【喉舌】왕명을 출납하는 요직을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왕의 명을 출납하니 왕의 후설이다" 하였다. 후승【後乘】임금의 수레 뒤를 따르는 종신(從臣)이라는 뜻으로, 즉 조정 안의 신하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후시【後市】연복(延卜). 조선 중기 연경(燕京)에 파견되었던 사행이 귀환할 때 그들을 맞이하러 들어가는 수백필의 쇄마(刷馬)편을 이용하여 의주(義州)에서 물화(物貨)를 수집한 봉성(鳳城)의 장사치들이 복물(卜物)을 운반 매매하는 것을 말한다. 후시【後時】좋은 때를 잃다. 후신고【後薪高】뒤에 벼슬길에 나왔으나 앞에 나온 사람보다 벼슬이 더 높음. 한 무제(漢武帝) 때에 신진(新進)들의 벼슬이 선배보다 높이 오르는 자가 많으니 급암(汲黯)이 아뢰기를, “폐하(陛下)의 사람 쓰는 것은 섶[薪]을 쌓는 것과 같아서 뒤에 오는 것이 위에 올라갑니다.” 하였다. 또, 휴효위(劉孝威) 원시(怨詩)에 “후신이 따라서 다시 높이 쌓였구나.[後薪隨復積]" 하였다. 후실유선성【後實逾先聲】선성(先聲)은 먼저 소문을 내어 적의 기세를 꺾어 놓는 것이고, 후실(後實)은 뒤에 실속있게 대비책을 강구해 놓는 것을 말한다. 《史記 淮陰侯傳》 후안무치【厚顔無恥】얼굴이 두꺼워 수치스러움을 모름. 뻔뻔스러움. 후영중일언【侯嬴重一言】후영은 전국시대 위(魏) 나라의 은사(隱士)로서 신릉군(信陵君)의 빈객이 되었는데, 신릉군이 조(趙)를 구원할 때 진비(晉鄙)를 죽여 병부(兵符)를 빼앗은 뒤 한단(邯鄲)의 포위를 풀게 하였음. 이때 연로하여 직접 따라가지 못하고 기일을 따져 자결함으로써 전송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실제로 그 말대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음. 《史記 卷七十七 侯嬴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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