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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안거【駟馬安車】사마 안거는 네 필의 말이 끄는 편안한 수레로, 상고 때 임금이 초야에 있는 현인을 초빙할 때 예우를 극진히 하는 뜻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곧 임금의 정중한 초빙을 뜻한다. 사마온공【司馬溫公】송(宋) 나라 유학자. 이름은 광(光), 자는 군실(君實), 호는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함. 죽은 뒤에 온국공(溫國公)에 추증(追贈)되었으므로 온공(溫公)이라 함. 사마자미【司馬子微】자미(子微)는 사마승정(司馬承禎)의 자(字). 사마승정은 당(唐) 나라 사람으로 호는 백운(白雲)ㆍ백운자(白雲子)ㆍ중암도사(中巖道士)이고, 시호는 정일선생(貞一先生)이다. 반사정(潘師正)을 따라 벽곡도인술(辟穀導引術)을 받아 개원(開元) 중에 소명(召命)을 입고, 조명(詔命)에 의해 왕옥산(王屋山)에 단실(壇室)을 쌓음. 세 가지 서체(書體)로 노자(老子)를 베껴 구문(句文)을 간정(刊正)함. 사마주【司馬柱】진취적으로 뜻을 세워 기필코 공명(功名)을 이루어 보겠다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처음 장안(長安)에 갈 때 촉도(蜀都)인 성도(成都)의 승선교(升仙橋)를 지나면서 그 기둥에 “대관(大官)이 되어 으리으리한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다시 건너지 않겠다.”고 썼던 고사가 있다. 《史記 司馬相如列傳》 사마지려【司馬知呂】사마는 사마광(司馬光), 여는 여공저(呂公著)를 이름. 사마광이 위독했을 때 여공저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내가 내 몸은 의원에게 맡기면 되고, 집안 일은 자식에게 맡기면 되지만 나라 일은 맡길 곳이 없어 걱정하다가 지금 공(公)이 맡도록 부탁하오.” 하였음. 《宋史 卷三百三十六》 사마참석【司馬鑱石】아무리 묘를 화려하게 꾸며도 후세 사람이 파헤치니 모두 소용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에 “자유(子游)가 ‘부자(夫子)가 송(宋) 나라에 있을 적에 사마(司馬) 환퇴(桓魋)가 석곽(石槨)을 아름답게 조각하느라고 3년이 되도록 완성하지 못하자 부자가 「이렇게 사치하게 꾸밀 바에야 죽어서 일찍 썩는 것이 낫다.」했다.’ 하였다.” 했다. 사마천【司馬遷】전한의 역사가. 지는 자장(子長). 경칭은 태사공(太史公). 젊었을 때 전국 각처를 주유(周遊)하며 전국 시대 제후(諸侯)의 기록을 수집 정리함. 기원전 104년 공손경(公孫卿)과 함께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여 후세 역법(曆法)의 기틀을 마련함. 아버지 사마담(史馬談)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됨. 흉노(匈奴) 토벌 중 포로가 되어 투항한 이릉(李陵)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을 받음. 기원전 97년 불후의 명저사기(史記)130권을 완성함. 사막【思邈】당(唐)의 은사(隱士) 손사막(孫思邈)이다. 음양(陰陽)ㆍ의약(醫藥)에 정통하였다. 사만보대【獅蠻寶帶】사만 보대(獅蠻寶帶)는 띠쇠[鉤]에 사자(獅子)와 만왕(蠻王)을 새겨 넣은 것으로, 고위직(高位職)의 무관(武官)이 허리에 두르는 요대(腰帶)이다. 사매지갈【思梅止渴】중국 삼국 시대에 조조(曹操)가 한더위에 행군하는데 모두 목이 타서 애쓰는 양을 보고 “내가 전에 이 고개를 넘을 때 저 너머에 커다란 매화나무밭이 있었는데 지금쯤 매실(梅實)이 한창 열었을 것이라.” 하자, 군사들은 그 신 매실을 입에 넣을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아 갈증을 잊었다 한다. 사맹【謝孟】사영운(謝靈運)과 맹교(孟郊)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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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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