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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참【舒慘】서참은 음양(陰陽)ㆍ고락(苦樂) 등 대립 개념을 총괄하여 표현하는 말이다. 서참【舒慘】양서 음참(陽舒陰慘)의 줄임말로 따뜻하게 펴주고 참혹하게 처벌함을 이른다. 서창곡【徐昌縠】서창곡은 명 나라 때의 문장가 서정경(徐禎卿)을 말하는데 창곡은 그의 자이다. 서천【西川】고향을 말함. 서천은 촉(蜀)을 가리키는데 촉 망제(蜀望帝)가 그의 신하 별령(鱉靈)의 아내를 간음하고서 왕위를 내놓고 도망갔다. 이때 촉인(蜀人)들이 망제를 슬퍼한 나머지 두견새 울음 소리가 불여귀거(不如歸去)라고 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함. 그래서 후세에 고향에 가고픈 소망을 말할 때 흔히 두견새와 서천을 인용함. 《蜀王本紀》 서천【西天】성군(聖君)이 있는 나라를 상징한 것. 시경(詩經)에서는 서주(西周)를 말하고 있음. 《詩經 邶風 簡兮》 서천십양금【西川十樣錦】촉(蜀) 나라 때 만든 열 가지 비단을 말한 것인데 사람의 조업(操業)이 무상한 것을 말함. 《佩楚軒客說》 서청【西淸】궁궐 안에 있는 서방(書房)을 말한다. 서청【西淸】궁성 내의 맑고 조용한 곳으로 보통 관각(館閣)을 뜻한다. 서청【西淸】홍문관의 별칭. 서촉민유화【西蜀民猶化】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 문옹(文翁)이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학교를 세워 문풍(文風)을 크게 떨치자, 그곳에 남아 있던 오랑캐의 풍속이 교화되었다. 《漢書 卷89 循吏傳 文翁》 서촉유통사마격【西蜀喩通司馬檄】사마(司馬)는 곧 한(漢)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한 무제(漢武帝) 때 낭중(郞中) 당몽(唐蒙)이 야랑(夜郞)ㆍ북중(僰中) 등 오랑캐의 땅을 점령하기 위해 파촉(巴蜀)의 이졸(吏卒) 수천 명을 징발하여 그들의 괴수를 군법(軍法)으로 베죽이곤 하므로, 파촉의 백성들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자, 무제의 명을 받고 사마상여가 격문(檄文)을 지어 파촉의 백성들을 효 하여 진정시켰던 일을 말한다. 《史記 卷一百十七 司馬相如傳》 서총대【瑞葱臺】임금이 임어(臨御)하여 무관(武官)의 활 쏘는 것을 점검하던 대(臺). 서총대【瑞蔥臺】창덕궁(昌德宮) 후원에 쌓았던 석대(石臺)와 정자. 연산군 때 만든 것으로 영화당(映花堂) 동남쪽인 지금의 춘당대(春塘臺) 동편에 있었다. 서총대포【瑞蔥臺布】연산군의 명으로 서총대 앞에 못을 파는 역사에 동원된 백성이 혹시라도 일을 빠지거나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감역관이 그 대가로 면포를 받아들였다. 이에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여 재산이 탕진되면 헌 옷에서 썩은 솜까지 빼내어 면포를 짜서 변상하였는데, 제품이 너무 헐어 쓸 수 없었으므로 후인들이 이 베를 ‘서총대’라고 하였고 시장에서 팔려고 하여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함. 서추【西樞】중추원을 이름. 서추【西樞未歸客】서추는 중추부의 별칭이다. 서축【西竺】서축은 천축국(天竺國)으로, 인도(印度)를 말한다. 서치【徐穉】후한 때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로 자는 유자(孺子). 동한(東漢) 남창(南昌) 사람으로 가난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았는데, 진번(陳藩)이 그곳의 태수(太守)가 되어 여타 손님들은 접대하지 않았으나 서치가 찾아오면 항상 특별히 자리 하나를 놓아주고 그가 떠나면 도로 걸어두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五十三 徐穉傳》 서침등욕절【鼠侵藤欲絶】불경(佛經)에, “어떤 사람이 깊은 구렁에 떨어지다가 칡덩굴에 걸려 위태로운 지경인데, 밑에는 독사가 우글거리고, 붉고 흰 쥐 2마리가 번갈아 칡덩굴을 쪼고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해와 달이 재촉하여 죽음이 가까워온다는 비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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