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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위【石尉】일찍이 남만 교위(南蠻校尉)를 지낸 진(晉) 나라의 거부(巨富) 석숭(石崇)을 말한다. 석음빙【夕飮氷】왕명(王命)을 받들고 책임감에 의해 몹시 두렵고 걱정이 되어 속이 타는 것을 이른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나는 아침에 명(命)을 받고 저녁에 얼음을 마셨으니, 나에게 내열(內熱)이 생겼는가 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석인【碩人】석인은 덕이 높은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하였다. 석인【碩人】아름다운 덕의 소유자를 일컫는 말로, 옛날 시랑(侍郞) 이상의 부인을 봉(封)할 때 이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석일모【惜一毛】세상이 이기주의(利己主義)로 변한 것을 탄식한 말. 양주(楊朱)는 전국(戰國) 때 사람으로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하여 자신의 털 하나를 뽑으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하여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다 . 《孟子 盡心上》 석작【石碏】석작은 춘추시대 때 위(衛)나라의 대부이다. 그의 아들 후(厚)가 자기의 경계를 듣지 않고 공자 주우(公子州吁)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서 환공(桓公)을 죽이고 주우를 왕으로 추대할 계책을 꾸미자, 그들을 진(陳)나라로 유인하여 죽인 뒤에 공자 진(公子晉)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웠다. 《左傳 隱公 三年, 四年條》 석작준【石作尊】소식(蘇軾)의 시에 “산사람이 권하는 술 국자가 필요 있나, 바윗돌 움푹 패어 술통을 이뤘는걸.[山人勸酒不用勺 石上自有尊罍窪]”이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9 次韻正輔同遊白水山》 석장【錫杖】선장(禪杖)을 이름. 막대에 육환(六環)의 금석(金錫)이 달려 있기 때문에 석장(錫杖)이라 칭함. 진(晉) 나라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游天台山賦)’에 “진정한 도인은 석장을 날려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躡虛]”라는 말이 있다. 석장군【石將軍】진(晉) 나라 갑부였다는 석숭(石崇)을 가리킨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태치(汰侈)에 “석숭은 금곡원(金谷園)에서 기생들이 손님에게 술을 취하도록 권하지 않으면 기생을 죽이기까지 했다.” 하였다. 석장무진【石藏無盡】불가의 무진장(無盡藏)을 말하는데 천만 덩이의 돌을 뜻하는 것임. 석전【釋奠】신(神) 앞에 술잔을 올리고 제사하는 것을 이름. 예기(禮記) 문왕 세자(文王世子)에 “무릇 학궁(學宮)을 세우면 반드시 선성(先聖)ㆍ선사(先師)에게 석전(釋奠)한다.” 하였으므로, 주자(朱子)는 창주(滄洲)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孔子)를 위시,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와 송조(宋朝)의 군자(君子)를 모셔 사시로 제사하였음. 석전【石戰】음력 대보름날 각지방에서 행하던 남성의 돌던지기 놀이는 ‘편쌈’ ‘石戰’ ‘便戰’ 으로도 불리었다. 전쟁에 대비하여 鍊武의 큰 뜻을 가지는 전투적 놀이로 삼포 왜변 때 석전선수들을 모아 왜인의 난동을 막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전승은 되고 있지 않음. 석전성선생【石田成先生】석전(石田)은 성로(成輅)의 호이다. 석점두【石點頭】도리(道理)가 투철하고 설복(說服)하는 힘이 강하여 다른 사람을 능히 신복(信服)시키는 것을 말한다. 중국의 축도생(竺道生)이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서 돌들을 모아 놓고 문도(門徒)로 삼은 다음 열반경(涅槃經)을 강론하면서 “내가 설법한 것이 부처의 마음과 들어맞는가?”하니, 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는데, 열흘 만에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蓮社高賢傳 道生法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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