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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마【宣麻】재상의 임명을 발표하는 것. 당나라 때 재상의 임명을 백마지(白馬紙)라 한데서 유래됨. 선만【蟺蠻】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소재 동해비(東海碑)에는, “蜒蠻”이라고 보임. 또 한유(韓愈)의 청하군공방공묘갈명(淸河郡公房公墓碣銘)에, “林蠻洞蜒’이라 했고 그 주에, ‘蜒當作蜑 南方夷也 蜑音誕’이라 했음. 선말【仙襪】낙신부(洛神賦)에 “凌波微步 羅襪生塵" 이라 하였고 황정견(黃庭堅) 시에 “凌波仙子生塵襪" 이란 글귀가 있다. 선명【先鳴】먼저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주작(州綽)이 제(齊) 나라와의 평음(平陰) 싸움에서 식작(殖綽)과 곽최(郭最)보다 앞서서 성(城)에 올라 닭이 울듯 크게 소리쳤다[平陰之役 先二子鳴]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春秋左傳 襄公 21年》 선명도【蟬鳴稻】올벼[早稻]의 별칭이다.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의 시(詩)에, 그 이름 어기지 않으려고 매미 우는 때를 기약했네. 눈으로 직접 새 곡식 보니 금년 일도 다했나 보구료. (不欲負其名 趁得蟬鳴詩 眼見新穀升 今年事亦畢)라고 하였다. 선모【旋毛】말의 털결이 선회한 모양으로 된 것. 이아 주(爾雅 注)에 “선모가 배 아래에 젖꼭지처럼 나면 천리마이다.” 하였음. 선묘실록【宣廟實錄】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말한다. 선조수정실록은 광해군 때 북인(北人)인 기자헌(奇自獻),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편찬된 선조실록의 내용이 공정치 못하다고 하여 인조 19년(1641)에 이식(李植)의 상소에 의하여 수정실록을 편찬하기로 결정하고 이식이 전담하여 편찬하였으나 이식이 다른 일로 파면되어 중단되었다. 그 뒤 효종 8년(1657) 3월에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김육(金堉), 윤순지(尹順之), 이일상(李一相), 채유후(蔡裕後) 등으로 하여금 편찬하게 하여 그해 9월에 완성을 보았다. 선문【羨門】옛 선인(仙人)으로 이름은 자고(子高)이다. 전한서(前漢書)에, “시황(始皇)이 동으로 노닐면서 신선(神仙) 선문(羨門)의 무리를 구했다.” 하였음. 선문비침【扇蚊飛枕】후한(後漢)의 황향(黃香)이 아버지를 지극한 효도로 섬겨, 여름에는 잠자리에 부채질하여 드렸다 한 데서 온 말로,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을 말한다. 선문자【羨門子】옛날 선인(仙人)인 선문자고(羨門子高)를 말하는데, 진 시황(秦始皇)이 일찍이 동해(東海)에 노닐면서 선인 선문의 무리를 찾았다 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선미【璿楣】궁궐의 문미(門楣)를 말함. 선반【仙班】임금을 시종(侍從)하는 관직의 반열을 말한다. 선반【仙班】청귀(淸貴)한 한림원(翰林院)의 벼슬을 가리킨다. 선발제인【先發制人】본래는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뜻. 남보다 앞서 일을 도모하면 능히 남을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선방【璇枋】방(枋)은 병(柄)과 같은데 즉 군병(君柄)과 같은 말임.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 가 있음. 선방궁【宣房宮】한 무제 원봉(元封) 연간에 호자에서 황하가 터졌을 때 그 입구를 막고 위에 세웠던 궁전 이름이다. 선백약【宣伯藥】가선백(賈宣伯)이 삼충(三蟲)을 다스리는 신약(神藥)을 갖고 있었는데, 오강(吳江)의 교룡이 사람을 해친다는 말을 듣고 몇 숟가락의 약을 던져 넣자, 그 다음날 아침에 교룡이 죽어 물에 떠 올랐다고 한다. 《淵鑑類函 卷438 蛟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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