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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례조벌수【習禮遭伐樹】공자가 조(曹) 나라를 떠나서 송(宋) 나라로 갔는데, 큰 나무 아래에서 예를 익히다가 송 나라의 사마환퇴(司馬桓魋)가 죽이려고 그 나무를 자르자 떠나갔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습매진【拾煤塵】공자가 진(陳) 채(蔡) 사이에서 곤궁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안회(顔回)가 쌀을 얻어 밥을 짓던 중에 재가 솥 안으로 들어가자 이것을 버리기가 아까워 손으로 집어먹었는데[拾塵], 이 행동이 몰래 밥을 훔쳐먹는 것으로 오인(誤認)되어 의심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呂氏春秋 卷17 審分覽 任數》 습수임류【拾穗林類】임류(林類)라는 사람이 나이 백세가 되었는데, 밭고랑에서 떨어진 벼이삭을 주우면서 노래를 하므로, 자공(子貢)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생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이 가며 노래하며 이삭이나 줍고 계십니까?”하였으나, 임류는 계속 가면서 노래를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天瑞》 습씨가【習氏家】진(晉) 나라 습욱(習郁). 그의 저택과 정원이 화려했고 특히 양어지(養魚池)가 있어 습가지(習家池), 일명 고양지(高陽池)로 유명했다. 습요【습燿】반딧불의 별칭임. 시경(詩經) 빈풍(豳風) 동산(東山)장에 “燿燿宵行”이라 하였음. 습유【拾遺】관명(官名)으로,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습유귀부강【拾遺歸涪江】습유는 당 나라 때 우습유(右拾遺)를 지낸 진자앙을 가리키며, 부강(涪江)과 금화산(金華山)에 그가 독서하던 학당(學堂)이 있었다. 습유기【拾遺記】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후진(後秦)의 왕가(王嘉)가 지은 책으로 모두 10권임. 습유보궐【拾遺補闕】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습유석호【拾遺石壕】두 습유는 당(唐) 나라 때 우습유(右拾遺)를 지낸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키고, 석호(石壕)는 두보가 지은 시편(詩篇)의 이름인 석호리(石壕吏)의 준말로, 이 시는 두보가 석호 마을을 지나다가 이 마을의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벼슬아치를 보고 그 정상을 읊은 것이다. 습재【習齋】권벽(權擘)의 호이다. 습주부【習注簿】진(晉) 나라의 습착치(習鑿齒)를 말한다. 습지【習池】습가지(習家池)의 준말로 일명 고양지(高陽池)라 한다. 진(晉) 나라 산간(山簡)이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을 때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와서 술을 마시고 갔다 한다. 습지【習之】습지(習之)는 당(唐) 나라 때 유학자(儒學者)인 이고(李翶)를 말하는데, 고승(高僧)인 유엄선사(惟儼禪師)와는 승(僧)과 속(俗)의 차이가 있었지만 유독 친했다 한다. 습지풍류【習池風流】술과 음식을 가지고 호수에 나가 배 위에서 마음껏 취하고 노닐다 오는 풍취를 말한다. 진(晉) 나라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에서 호족(豪族)인 습씨(習氏) 집안의 연못[習家池] 위에 배를 띄우고 술마시며 노닐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蒙求 上 山簡倒載》 습착치【習鑿齒】습착치는 진(晉)의 문장가이다. 당서(唐書) 두심언전(杜審言傳)에 “나의 문장은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을 잡아다가 아관(衙官)으로 삼을 수 있다.” 하였다. 승가굴【僧伽窟】서울 삼각산에 있는데, 신라 중 수태(秀台)가 바위를 뚫고 굴을 만들었다. 승강왕래【升降往來】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영허(盈虛)ㆍ소식(消息)과 승강ㆍ왕래하는 이치를 이른 말이다. 승개【勝槪】훌륭한 경치 승건지세곤【承乾地勢坤】주역(周易) 곤괘(坤卦) 상(象)에 “지세가 곤이다.[地勢坤]”하였는데, 그 내용은 즉 지형(地形)은 방직(方直)하므로 불순(不順)하나, 그 형세는 하늘을 받듦으로 이것이 곧 순(順)이라는 것이다. 승겁해【僧劫解】혼례를 치른 신부가 사흘 저녁을 도승(道僧)과 잔 뒤에 신랑과 비로소 동침(同寢)하는 것을 말한다. 승견책비【乘堅策肥】튼튼한 수레를 타고 살찐 말에 채찍질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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