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부견【苻堅】전진(前秦)의 3대 임금. 이름은 문옥(文玉), 자는 영고(永固). 시호(諡號)는 세조(世祖). 저족(氐族) 출신. 2대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한 후 농경(農耕)을 장려하고 법제(法制)를 정비‧확립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씀. 376년 화북(華北 황하 중‧하류 지방)을 평정하고 전진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음. 국력이 신장되자 천하 통일의 야망을 품고 383년 동진을 쳤으나 비수의 싸움에서 대패함. 나라가 분열된 가운데 3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음. 부견편【符堅鞭】부견(符堅)은 전진(前秦)의 임금. 대거(大擧)하여 동진(東晉)에 침구(侵寇)할 때에 큰 소리 쳐 말하기를, “나의 숱한 군사로 채찍만을 강에 던져도 족히 흐르는 강물을 끊으리라.” 하였다. 부고발계【婦姑勃磎】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방안에 공간이 없으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장소를 서로 다투어 반목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부곡【部曲】사신을 수행해서 간 군사(軍士)를 말한다. 부공헌납【富公獻納】부공은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부필(富弼)로, 부필이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헌(獻) 자와 납(納) 자를 쓰는 일을 가지고 거란의 임금과 다툰 일을 말한다. 부과침리【浮瓜沈李】여름철의 우아한 노닒을 이른 말. 위 문제(魏文帝)가 오질(吳質)에게 준 글에 “단 오이를 맑은 샘에 띄우고, 붉은 오얏을 찬물에 담근다[浮甘瓜於淸泉 沈朱李於寒水].” 하였다. 부곽전【負郭田】성(城)을 등지고 있는 전지(田地). 전국 시대 때의 소진(蘇秦)은 집이 가난하여 고향을 떠나 육국(六國)의 왕을 유세(遊說)하다가 육국의 정승이 되었다. 고향에 다니러 와서 탄식하기를, “내가 부곽전(負郭田) 수경(數頃)만 있었더라면 어찌 육국 정승의 인(印)을 찰 필요가 있었겠느냐.” 하였다. 부광【扶光】부상은 동쪽 바다의 해 돋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으로, 막 떠오르는 아침 해를 가리킨 말이다. 부괴【桴蕢】흙을 쌓아서 만든 북. 부고(拊鼓)라고도 하며, 괴초(蒯草)를 묶어서 만든 괴부(蕢桴)라는 북채로 연주하였으므로 이른 말임. 부괵【俘聝】포로, 또는 죽인 적(敵)의 왼쪽 귀. 부구【浮丘】고대의 선인(仙人) 부구공(浮丘公)을 말한다. 황제(黃帝) 때 사람이라고도 하고 주 영왕(周靈王) 때 사람이라고도 하는 등 여러 설(說)이 있다. 부구공【浮丘公】주 영왕(周靈王) 때 선인(仙人). 일찍이 왕자 진(王子晉)과 함께 학을 타고 생황을 불며 숭산(嵩山)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太平府志》 부구광성【浮丘廣成】부구공과 광성자는 모두 황제(黃帝)때의 선인(仙人)이다. 부구씨【浮丘氏】옛 선인(仙人)인데, 혹은 황제(黃帝) 때 사람이라 하고, 혹은 주 영왕(周靈王) 때 사람이라고도 하며, 혹은 한(漢) 나라 초기의 부구백(浮丘伯)이라고도 한다. 부굴【富窟】유사(遺事)에 “왕원보(王元寶)는 도성(都城) 안의 큰 부호(富豪)로서 금은(金銀)으로 옥벽(屋壁)을 만들고 그 외부는 홍니(紅泥)로 발랐다. 또 집 안에 한 채의 예현당(禮賢堂)이 있는데, 침향목(沈香木)ㆍ단향목(檀香木)으로 마루를 만들고 무부(碔砆)로 지면(池面)을 깔고 금문석(錦文石)으로 주추를 만들었으며, 동선(銅線)으로 돈[錢]을 꿰어 후원 꽃길[花徑]에 깔았으니, 이는 비가 와도 미끄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에 사방의 빈객(賓客)들이 마치 자기집 찾아들듯 했으므로 사람들이 왕가(王家)의 부굴이라 했다.” 하였다.
10/20/30/40/50/60/70/80/90/100/10/20/30/40
|
|
|
|
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
|
|
|
||
Copyright (c) 2000 by Ansg All rights reserved <돌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