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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려【桐廬】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가 부르는데도 나가지 않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하며 숨어살았다 한다. 《後漢書 嚴光傳》 동령【動鈴】구걸(求乞)하는 일. 조선 후기에 수령(守令)이 부임하면, 그 관아의 사령(使令)들이 수령에 대한 문안을 핑계하여 동령 혹은 조곤(釣鯤)이라 칭하면서 백성에게 그 비용을 거두었는데 동령은 맨손으로 구걸하는 것, 조곤은 술을 가지고 구걸하는 것이다. 동로가【東魯家】주인 없이 텅 빈 고향 집을 가리킨다. 이백(李白)의 시 ‘동로에 있는 어린 두 자식에게 부치다.[寄東魯二稚子]’에 “동로에 붙어사는 우리네 가족, 귀음의 전답에다 누가 씨를 뿌려 줄까.[我家寄東魯誰種龜陰田]”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12》 동로옹【東魯翁】공자(孔子)를 가리킨 말이다. 동뢰수연【同牢壽宴】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잔치를 말한다. 신혼 부부가 침실에서 함께 혼례 음식을 드는 것을 동뢰(同牢)라고 하였다. 《禮記 婚儀》 동료【凍醪】봄에 먹기 위하여 겨울에 빚어 둔 술을 말한다. 동룡【銅龍】동룡문(銅龍門). 한대(漢代) 태자궁(太子宮)의 문 이름. 제왕의 궁궐의 뜻으로 빌려 쓰기도 한다. 한서(漢書) 성제기(成帝紀)에 “왕이 급하게 태자를 부르니 용루문(龍樓門)에서 나왔다.” 한 주(注)에 “문루(門樓) 위에 구리로 만든 용[銅龍]이 있으므로 용루(龍樓)라고 한다.” 하였다. 동룡문【銅龍門】구리로 만든 용으로 장식한 한(漢) 나라 태자의 궁문(宮門) 이름인데, 보통 제왕의 궁궐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漢書 成帝紀》 동루【銅樓】동루는 한대(漢代) 태자궁(太子宮)의 문루(門樓)인 동룡루(銅龍樓)의 준말, 동류【東流】사물이 점차 사그라져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동류불일【東流不溢】동쪽으로 흘러 넘치지 않는다. 동륙【東陸】태양이 운행하는 동방 칠수(東方七宿)의 구역을 말한다. 동릉【東陵】진(秦) 나라 때 소평(召平)이 동릉후(東陵侯)로 있다가 진 나라가 망한 뒤에 포의(布衣)를 입고 지내면서 장안성(長安城)의 동쪽에 오이를 심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동릉오이’ 또는 ‘청문오이’라고 불렀다. 동릉과【東陵瓜】한(漢) 나라 소평(邵平)이 동릉후(東陵侯)를 그만두고 청문(靑門) 밖에서 가꾼 감미로운 오이를 말한다. 동릉과지【東陵瓜地】동릉은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진 소평(召平)을 말함. 그는 진 나라가 망하자 가난한 선비가 되어 장안(長安) 동쪽 땅에 오이를 심어 가꾸었는데, 오이가 매우 맛이 좋아 세속에서 이를 ‘동릉과(東陵瓜)’라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五十四》 동릉소평포【東陵邵平圃】소평(邵平)이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졌는데,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가난한 선비의 신분으로 장안(長安)의 성(城) 동쪽에 오색과(五色瓜)를 심어서 생활을 영위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동릉주선포인간【東陵晝膳脯人肝】도척(盜跖)이 동릉(東陵)에서 사람의 간(肝)으로 회를 쳐서 점심 반찬으로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동릉후【東陵侯】동릉후는 곧 진(秦) 나라의 소평(召平)의 봉호. 소평은 진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장안성(長安城) 동쪽에 살면서 오이를 심어 생활을 영위했다. 세상에서는 이 오이를 동릉과(東陵瓜)라 하였다. 《史記 蕭相國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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