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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구경  

 

 

 

 

동리【東里】동리는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살았던 지명으로 곧 자산을 지칭하는 말인데,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사명(辭命)을 짓는 데는 비심(裨諶)이 초(草)하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자우(子羽)가 수식(修飾)하고, 동리가 윤색(潤色)한다.” 하였다.

동리국【東籬菊】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陶淵明集 卷3》

동리연분【東籬緣分】국화를 가장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 도잠(陶潛)의 시에, “동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음.

동리옹【東籬翁】동리 노인은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이 동쪽 울타리 가에 국화를 심었으며, 갈건(葛巾)으로 술을 걸러서 마셨다.

동리유상원【東籬幽賞遠】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전원 생활을 즐기면서 국화를 몹시 좋아하였는데, 그가 지은 시에 “동쪽 울서 국화꽃을 따 들고, 한가로이 남쪽 산을 바라다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다. 《南史 卷75 隱逸列傳上 陶潛》

동리일타【東籬一朶】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 잡시(雜詩)의 “동쪽의 울밑에서 국화를 따다 무심히 남녘 산을 바라본다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나온 것으로, 국화를 가리킨다.

동리진물색【東籬眞物色】도연명이 9월 9일 중양절에 좋아하는 술도 없이 울타리 가의 국화꽃을 따면서 하염없이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때마침 자사(刺史)인 왕홍(王弘)이 보낸 백의 사자(白衣使者)가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취하도록 마시고 돌아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宋書 卷93 陶潛傳》

동림【東林】동림서원(東林書院)의 약칭. 송(宋)의 양시(楊時)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다 동림서원을 세워두고 학문을 강론했는데, 당시 사대부들로서 가슴에 경륜을 지니고 세상과 맞지 않은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그때 집권파인 위충현(魏忠賢) 일파로부터 동림당(東林黨)이라는 지목을 받고 숙청까지 당했다가 충현이 복주(伏誅)된 후 다시 번성하였음. 《明史 顧憲成傳》

동림【東林】동쪽에 있는 숲으로, 일본을 가리킨다.

동림사【東林寺】중국에 있는 절인데 백거이(白居易)가 있었다.

동림사【東林寺】진(晉) 나라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머물던 여산(廬山)의 절 이름으로, 이곳에서 당시의 고사일인(高士逸人) 18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함께 모여 노닐었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동림승패【東林勝敗】사화(士禍)나 당쟁(黨爭)을 말함. 송(宋)의 양시(楊時)가 무석(無錫)에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세웠는데, 명대(明代)에 와서 고헌성(顧憲成)등이 그것을 중수하고 학문을 강마하면서 혹은 국정을 논평하기도 하고 인물을 품평하기도 하여 당시 사대부들이 많은 향응을 하였고 그리하여 드디어 동림당(東林黨)이 형성되었다. 그 후 위충현(魏忠賢)이 득세하자 그간 동림당을 시기하고 있던 자들이 그것을 기회로 중상모략을 하여 당옥(黨獄)을 일으켜 거의 망타가 되었다가 충현이 복주(伏誅)되고 나서 공론이 다시 밝아졌다고 함. 《明史 顧憲成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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