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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림칠서【杜林】두림은 후한 때의 경학자이고, 두림이 일찍이 칠서(漆書)로 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어 매우 소중히 간직해 오다가, 마침내 위굉ㆍ서순을 만나 그들에게 전수함으로써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二十七》 두모【杜母】두모(杜母)는 후한 때 남양태수(南陽太守)로서 남양을 대단히 잘 다스려, 백성들이 그를 어머니와 같다 하여 두모라 호칭했던 두시(杜詩)를 가리킨다. 《後漢書 卷三十一》 두목【杜牧】만당(晩唐) 시인, 자(字)는 목지(牧之) 호(號)는 번천(樊川), 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이다. 시부(詩賦)에 능(能)하고 풍류(風流)와 아량(雅量)이 있었으며 강개롭게 병사(兵事)를 논하기를 즐겼다. 《唐書 卷一百六十六 杜牧傳》 두목중서루배낭【杜牧中書屢拜囊】조낭은 검은 베로 만든 전대인데 여기에 글을 싸서 임금에게 올렸다. 당(唐) 나라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낸 두목은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뛰어난 절개가 있어 매양 조정의 대사(大事)와 시폐(時弊)를 잘 논술하여 당시 직소(直疏)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新唐書 卷六十六 杜牧傳》 두목지【杜牧之】두목(杜牧)의 자(字), 호(號)는 번천(樊川), 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이다. 시부(詩賦)에 능(能)하고 풍류(風流)와 아량(雅量)이 있었다. 《唐書 卷一百六十六 杜牧傳》 두목참【杜牧慙】당(唐) 나라 문장가로 자(字)는 목지(牧之)이며, 진사로 뽑힌 뒤 호주 자사(湖州刺史) 등을 지냈다. 그가 포의(布衣)로 있을 당시 친구가 자사(刺史)로 있는 호주(湖州)에 놀러갔다가 10여 세에 지나지 않는 절색의 기생을 만났는데 그때 그는 10년 후 자기가 자사로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 하고 돌아왔다. 14년 만에 자사로 부임하자 이미 그녀는 결혼하여 자식을 둘이나 거느린 부인으로 변해 있었다. 두목호주거교지【杜牧湖州去較遲】당(唐) 나라 두목이 호주(湖州)에 노닐 때 그곳 자사(刺史)와는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그는 자사의 주선으로 여러 미녀를 두루 보았으나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다가 10여 세 된 소녀가 하나 왔는데 자세히 보니 참으로 절색이었다. 그러자 두목은 10년 뒤에 맞이하겠다면서 만약 10년 뒤에 맞이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데로 출가해도 좋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왔는데 14년이 지난 뒤에야 가 보니, 그녀는 이미 3년 전에 출가하여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으므로 두목은 “봄을 찾는 약속이 늦었으니 꽃다운 시절 한할 필요 없으리. 광풍이 붉은 꽃 다 떨어뜨려 푸른 잎 짙게 피고 열매가 주렁주렁하구나.”라는 시를 남기고 섭섭해하였다. 《張君房 麗情集》 두무악【頭無岳】남방 해변에서 해채(海採)를 생업으로 하는 제주인(濟州人)으로 이들은 조주(操舟)ㆍ잠수(潛水)에 능하였다. 두무악은 본디 한라산(漢拏山)의 이명(異名)이다. 두문불출【杜門不出】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음. 곧, 집안에만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가지 않음. 두미【斗尾】전북 진안(鎭安)의 산골 이름이다. 두미삼전【斗米三錢】옛날에는 쌀값이 쌀수록 백성이 살기가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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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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