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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타유【張打油】저속한 시(詩)를 뜻함. 양승암집(楊升庵集)에 의하면, 당(唐) 나라 장타유(張打油)가 눈[雪]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노란 개는 몸 위가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 위가 부어올랐다[黃狗身上白 白狗身上腫].”고 했다 함. 장탕【張湯】장탕은 전한(前漢) 때 법관으로서 아주 혹리(酷吏)였다. 무제 때 태중대부(太中大夫)로서 율령(律令)을 만드는 데 참여했고,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서는 법문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어 뒤에 주매신(朱買臣)등의 무함을 받고 자살하기에 이르렀음. 《漢書 卷五十九》☞ 서옥(鼠獄) 장탕【張湯】한 나라 때 공신 세족(功臣世族)으로 자손으로 선제(宣帝)ㆍ원제(元帝)이후 시중(侍中)과 중상시(中常侍)를 지낸 사람이 10여 인이나 되었다. 장탕교무문【張湯巧舞文】한 무제(漢武帝) 때에 혹리(酷吏) 장탕(張湯)이 법문(法文)을 교묘히 환롱(幻弄 舞文)하여 가혹하게 다스렸다. 장탕옥【張湯獄】장탕은 한(漢) 나라 때의 옥관(獄官)이다. 그가 어렸을 적에 집을 보다가 쥐에게 고기를 도둑맞은 일이 있었는데,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서는 쥐 굴을 파헤쳐 쥐를 잡고 먹다 남은 고기도 꺼내어 뜰에다 감옥의 모양을 갖추어 놓고 핵문(劾文)을 지어 쥐를 신문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 글을 보니 노련한 옥리(獄吏)보다 나았으므로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漢書 卷五十九》 장탕우거반【張湯牛車返】장탕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옥관(獄官)으로 법 집행이 혹심(酷深)하기로 유명하였는데, 그가 뒤에 탄핵을 받고 자살하여 그의 형제들이 후장(厚葬)을 하려 하자, 그의 모친이 말하기를, “탕은 천자의 대신으로서 나쁜 말을 듣고 죽었는데, 어찌 후장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곽(椁)도 없이 관(棺)만 갖추어 우거(牛車)에 실어서 장사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九》 장평【長平】성 이름으로 전국 시대 진(秦) 나라 백기(白起)가 조(趙) 나라 조괄(趙括)의 군사를 대파하고 항졸(降卒) 40여만 명을 땅에 파묻어 죽였다. 《史記 趙世家》 장평【長平】진(秦)의 장수 백기(白起)가 장평관(張平關)에서, 전쟁에 패하고 항복해온 조(趙)의 40만 대군을 속임수를 써서 한꺼번에 갱살(坑殺)하였음. 《史記 白起傳》 장평갱【長平坑】장평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읍명(邑名)인데, 진(秦) 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여기서 조 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항복한 조 나라의 수많은 군졸을 여기에 생매장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秦紀》 장평자【張平子】장형(張衡)의 자(字). 벼슬하다가 돌아와서 귀전부(歸田賦)를 지었다. 장평자【張平子】후한(後漢) 시절의 장형(張衡). 평자(平子)는 그의 자임. 자기 심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유명한 사현부(思玄賦)를 지었음. 《後漢書 卷五十九》 장포【漳浦】옛날 삼국 때 위(魏)의 유정(劉楨)은 병이 있어 늘 장포에 누워 있었으므로 앓고 있는 시골을 가리키게 되었다. 장포【張酺】자는 맹후(孟侯). 후한 화제(後漢和帝) 때 사도(司徒)를 지냈으며 상서(尙書)에 밝았다. 《後漢書 卷七十五》 장포자리거【漳浦子離居】병으로 말미를 청해 시골에서 쓸쓸히 지낸 것을 말한다. 한말(漢末)에 유정(劉楨)이 조비(曹丕)에게 보낸 시 가운데 “余嬰沈痼疾 竄身淸濱”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告休漳浦”라는 숙어가 파생되었다. 《文選 贈五官中郞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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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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