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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구【絶句】한시 근체시(近軆詩)의 하나. 기(起)ㆍ승(承)ㆍ전(轉)ㆍ결(結)의 네 구로 되어 있음. 절구의맹씨【竊屨疑孟氏】맹자(孟子)가 등(滕) 나라에 가서 상궁(上宮)에 묵고 있을 적에, 관인(館人)이 들창 위에 신들 두었다가 잃어버리고는 맹자의 종자(從者)가 훔쳐간 것으로 의심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下》 절극【折屐】매우 기뻐한다는 뜻. 진(晉) 나라 재상(宰相) 사안(謝安)이 그의 조카 현(玄)을 보내어 진병(秦兵)을 막게 하였는데, 현(玄)이 8천 명의 군사로써 진 나라 백만 대병을 쳐부수었다. 보고하는 글이 이를 때에 사안은 한창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손이 소식을 물으니 사안을 기뻐하는 기색을 나타내지도 않으며, “아이들이 도적을 이미 쳐부수었군.” 하고, 바둑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손을 보내고 문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무신의 이[齒]가 문턱에 걸려서 부러지는 줄도 몰랐으니 그것은 매우 기뻤기 때문이었다. ☞ 희절극(喜折屐) 절극침철【折戟沈鐵】두목(杜牧) 적벽시(赤壁詩)에 “꺾인 창 모래에 잠겼어도 쇠는 썩지 않아 그것을 가지고 전조의 일을 아누나[折戟沈沙鐵未消 自將磨洗認前朝]" 하였음. 절동【浙東】절동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절강 동부지역이다. 소식(蘇軾)이 절강 가흥현(嘉興縣)에 있는 보본선원(報本禪院)에 들러 그 절의 중 문 장로(文長老)를 만나 지은 “내년에는 약을 캐러 천태산에 갈 예정이라. 또한 다시 시를 써서 온 절동 퍼뜨리고파[明年採藥天台去 更欲題詩滿浙東]" 라고 한 시가 있다. 《蘇東坡詩集 卷八 秀州報本禪院鄕僧文長老方丈》 절등류편【截鐙留鞭】유사(遺事)에 “요원숭(姚元崇)이 형주목(荊州牧)으로 있은 지 3년 만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민(吏民)들이 흐느끼며 말머리를 둘러싸고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등자를 끊고 채찍까지 붙잡았다. 신목(新牧)이 이를 상주(上奏)하자, 조서를 내려 미행(美行)을 칭찬하고 금(金) 1천 냥을 하사했다.” 하였다. 절람【折欖】서한 성제(西漢成帝) 때 직신(直臣) 괴리영(槐里令) 주운(朱雲)이 성제 앞에서 칼을 청하며 간신의 머리를 베겠다고 하니 성제가 누구냐고 묻자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라고 하였다. 이에 성제가 크게 성내며 말하기를 “면전에서 나의 스승에게 욕을 하니 죽어야 마땅하다.” 하면서 어사(御史)에게 끌어내리도록 하였는데, 주운이 난간을 붙잡아 난간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 《漢書 卷六十七》 절람【竊藍】절람은 청색(靑色)을 이른 말로, 호(鳸)라는 새가 여름에는 흑색이 되고, 가을에는 청색이 되고, 겨울에는 황색이 되곤 하므로, 계절에 따라 이 새를 절람ㆍ절현(竊玄)ㆍ절황(竊黃) 등으로 부른 데서 온 말이다. 절로노호【折蘆老胡】선종(禪宗) 동토(東土)의 초조(初祖) 달마(達摩). 천축(天竺) 향지왕(香至王)의 셋째아들인 그가 양(梁) 대통(大通) 원년(527)에 인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광주(廣州)에 상륙할 때까지 갈대를 꺾어 그것을 타고 왔다 한다. 절류곡【折柳曲】고대의 악부 가운데 하나인 절양류곡(折楊柳曲)으로, 버들가지를 꺾으면서 이별하는 아쉬운 정을 노래한 것이다. 절류번포【折柳樊圃】시경(詩經) 제풍(齊風) 동방미명(東方未明)에 있는 시로서 즉 “버들을 꺾어서 포전의 울을 막아 놓으면 미친 사람도 달리 본다[折柳樊圃 狂夫瞿瞿].”는 것을 이름. 절류번포이구구지광【折柳樊圃而瞿瞿之狂】시경(詩經)에, “버들가지를 꺾어 꽂아 울타리를 만들어 놓아도 미친 사람이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허둥거린다.”는 구절에서와 같이, 미친 사람도 이러한데, 하물며 정상적인 사람이 아침ㆍ저녁의 분명한 시간도 지키지 못하는가 하는 뜻이다. 절륜【絶倫】같은 무리(동료)들 보다 훨씬 뛰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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