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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照犀】옛날 온교(溫嶠)가 우저기(牛渚磯)란 곳에 이르니, 그 곳 물이 깊어서 밑을 볼 수가 없는데, 사람들은 그 속에 괴물이 많다고 하므로, 온교가 물소뿔을 태워서 비추자 그 괴물들이 환히 보였다고 한다. 조서【曹徐】조는 위(魏) 나라의 조식(曹植), 서는 후한(後漢) 건안 칠자(建安七子)의 하나인 서간(徐幹)을 가리킨다. 조서【徂署】죄인 김처선(金處善)을 미워해서 처서(處署)를 고쳐 부르던 말. 조서모동【朝西暮東】지조 없이 이익만 쫓아다니는 위인을 비유하여 풍자한 말이다. 조서산미궐【祖西山薇蕨】서산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는 수양산(首陽山)으로, 곧 백이ㆍ숙제의 충절(忠節)을 조종(祖宗)으로 삼았음을 말한 것이다. 조서흑두【曹蜍黑頭】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근근이 목숨만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같은 인물은 천 년 전에 죽었어도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늠름한데, 조여(曹蜍)와 이지(李志) 같은 무리는 지금 살아 있어도 땅속에 묻힌 사람처럼 어둡기만 하다.”라는 말이 있다. 조석【祖席】송별연을 베푸는 자리. 한유(韓愈) 조석시(祖席詩)에 “낙교(洛橋)에 송별연을 베푸니, 다정한 친구 서로 슬퍼하네.” 하였다. 조석오【朝夕烏】한서(漢書) 주박전(朱博傳) 에 “어사부(御史府) 안에 잣나무가 열을 지어 있어 항상 들까마귀 수천 마리가 그 위에서 깃들어 자며 새벽에 날아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오므로 조석오(朝夕烏)라 이름했다.” 하였다. 조선대고【朝鮮大賈】선조(宣祖) 당시 부경(赴京)하는 사신 일행 가운데 몰래 인삼 등을 소지하고 중국에 가 밀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중국사람들이 우리나라 사신 일행을 장사치에 비유하여 기롱한 말. 조선술【趙善述】선술은 조찬한(趙纘韓)의 자(字)이다. 조소【鳥巢】조과(鳥窠)와 같다. 당(唐) 나라 고승(高僧)에 조과선사(鳥窠禪師)가 있다. 조소【嘲笑】조롱하며 비웃는 웃음. 조송곡이빈【曹松哭李頻】당(唐) 나라 시인 조송(曹松)이 건주 자사(建州刺史) 이빈(李頻)에게 후은(厚恩)을 입고서 그가 죽은 뒤에 ‘곡이빈원외(哭李頻員外)’라는 시를 지었는데,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방 장관으로 건주에 부임했다가, 관소에서 그만 세상을 뜨셨는가. 괴로운 시절 그 시문들 펼쳐보지 말지어다, 맑은 자질 파직되어 낭관으로 옮겨졌네. 장수(瘴水)가 술잔 올릴 아들도 하나 없이, 고개 너머 청상 과부 아내 있을 뿐. 정녕 묻힌 뼈 향기 감돌아, 동쪽으로 고향 찾아 돌아오리라.[出麾臨建水 下世在公堂 苦集休開篋 淸資罷轉郞 瘴中無子奠 嶺外一妻孀 定是浮香骨 東歸就故鄕]” 《全唐詩 卷716》 조송설【趙松雪】송설은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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