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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루【秦樓】왕의 부마가 사는 화려한 저택을 말한다. 진 목공(秦穆公)이 딸 농옥(弄玉)과 사위 소사(蕭史)를 위해 멋진 누대를 지어 주었는데, 그 이름을 봉루(鳳樓) 혹은 진루(秦樓)라고 하였다. 진 나라 목공의 딸 농옥이 음악을 좋아하였는데,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어서 봉새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에 목공이 농옥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누각을 지어 주었는데, 이들 두 사람이 퉁소를 불면 봉황이 날아와서 모였으며, 이들 두 사람은 그 뒤에 봉황을 타고 날아갔다고 한다. 《列仙傳》 진루【秦樓】춘추 시대 진(秦) 나라의 봉대(鳳台)를 지칭한다.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피리의 명인 소사(蕭史)에게 시집을 가서 열심히 배운 결과 봉명곡(鳳鳴曲)을 지어 부르게 되자, 목공이 그들을 위해 봉대(鳳臺)를 지어 주고 거하게 하였는데, 뒤에 부부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後漢書 矯愼傳 注》 진루【秦樓】기생집[妓館]을 뜻함. 진루객【秦樓客】진루의 나그네란, 바로 진 목공(秦穆公) 때 퉁소를 잘 불던 사람으로, 진 목공의 딸 농옥(弄玉)과 결혼하여 봉루(鳳樓)에서 함께 살다가 뒤에 부부가 함께 봉황(鳳凰)을 타고 신선이 되어 갔다는 소사(蕭史)를 가리키는데, 당(唐)나라 이상은(李商隱)의 무제시(無題詩)에 “어찌 알았으랴 하룻밤에 진루의 나그네가, 오왕의 원내의 꽃을 훔쳐 볼 줄을[豈知一夜秦樓客 偸看吳王苑內花].” 한 데서 온 말이다. 진루월【秦樓月】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달 아래서 퉁소를 불다가 자봉(紫鳳)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임. 진루취봉【秦樓吹鳳】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악(樂)을 좋아하였는데,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므로 목공이 소사에게 농옥을 아내로 삼아주고 봉루(鳳樓)를 지어 주었던 바 봉루에서 두 사람이 퉁소를 불자 봉황새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진류은【陳留隱】진류는 어느 지명(地名)인데 진류 사람 장승(張升)이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붕당 싸움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류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친구를 만나 풀을 깔고 앉아서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그 곳을 지나다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용이 비늘을 감추지 못하고 봉황이 날개를 감추지 못했으니 이 높이 쳐진 그물 속에서 가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비록 울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하였다고 함. 진류노부(陳留老父). 《後漢書 陳留老父傳》 진리【津吏】나루터의 선박과 교량을 주관하는 아전을 말한다. 진린【陳璘】정유 재란(丁酉再亂) 때 우리나라에 파견되었던 명(明)의 수군 제독. 진림【陳琳】동한 광릉(廣陵) 석양(射陽) 사람으로 자는 공장(孔璋)이다. 문장이 뛰어나 일찍이 원소(袁紹)를 위해 조조(曹操)의 죄상을 문책하는 격문을 지었는데, 원소가 패하여 조조에게 돌아가니 조조는 그 재주가 아까워 죄를 주지 않고 기실(記室)을 삼았다 한다. 《三國志 卷二十一 陳琳傳》 진림【陳臨】후한(後漢) 때의 순리(循吏). 진림이 창오 태수(蒼梧太守)로 있으면서 정성을 다해 효제(孝悌)로써 백성을 잘 다스렸고, 심지어는 살인한 사람이 자식이 없음을 알고는 그의 아내를 감옥으로 불러들여 남편과 동침을 하게 해서 끝내 자식을 얻게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뒤, 그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5월 5일이면 동성문(東城門) 위에서 그를 제사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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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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