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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덕어치우【流一德於置郵】치우는 문서와 소식을 전달하는 역참(驛站)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덕이 유행하는 것은 역참을 두어 명을 전달하는 것보다도 더 빠르다.” 하였다. 유일무이【唯一無二】오직 하나 뿐으로 둘도 없음. 유잉【有仍】나라 이름. 하(夏) 나라 임금 상(相)이 유잉씨에게로 장가들어 소강(少康)을 낳았음. 유자【惟玆】‘惟’는 어기사이며, ‘玆’는 이러한의 뜻. 유자【兪子】자가 극기(克己)인 유호인(兪好仁)을 가리킨다. 유자【孺子】후한 때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의 자(字)이다. 그는 특히 남주(南州)의 고사로 일컬어졌고, 태수(太守) 진번(陳蕃)이 다른 손님은 일체 만나지 않고, 서치가 올 때에만 특별히 의자를 마련했다가 그가 떠나면 다시 치워 버렸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徐穉傳》 유자가교【孺子可敎】젊은이는 가르칠 만하다는 것으로, 열심히 공부하려는 아이를 칭찬하는 뜻의 고사성어. 유자기유고무담【柳子記留鈷鉧潭】당(唐)나라 때의 문장가인 유종원(柳宗元)을 이름. 그가 고무담기(鈷鉧潭記)를 지었으므로 한 말이다. 유자산【庾子山】자산은 북주(北周)의 시인 유신(庾信)의 자(字)로, 시풍(詩風)이 염려(艶麗)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세상에서 유 개부(庾開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자선【兪子先】자선(子先)은 유백증(兪伯曾)의 자(字)이다. 인조 3년 홍문관 부응교로 있으면서, 대사헌 남이공이 김류(金瑬)의 세도를 믿고서 불법을 자행한다고 탄핵했다가 이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유자수【兪子修】자수는 유성증(兪省曾)의 자이다. 유자음【遊子吟】유자음은 본디 당 나라 맹교(孟郊)의 시인데, 그 시에 “어머니가 손수 바느질한 것은 나그네가 입을 옷이로다 떠남에 당하여 촘촘히 깁는 것은 더디 돌아올까 염려한 때문인데 촌초의 마음을 가져다가 삼춘의 봄볕에 보답하기 어려워라[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하였다. 유자중석진【儒者重席珍】예기(禮記) 유행(儒行)에 유자(儒者)의 고상한 도덕을 형용하여 “유자는 자리 위의 보배를 가지고 초빙을 기다린다.” 하였음. 유자탑【孺子榻】환대를 극진히 하였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태수(太守) 진번(陳蕃)이 다른 사람의 면회는 일체 거절하고, 서지(徐穉)가 올 때에만 상탑(床榻)을 내려놓고 환담하다가 그가 가면 다시 올려놓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자(孺子)는 서지의 자(字)이다. 《後漢書 卷83》 유자후【柳子厚】자후는 당(唐) 나라 문인 유종원(柳宗元)의 자. 유주 자사(柳州刺史)를 지냈으므로 세상에서 유유주(柳柳州)라 부름. 유작유소【維鵲有巢】비둘기는 본디 집을 지을 줄 몰라서 까치의 둥지를 차지하고 산다하여, 시경(詩經) 소남(召南) 작소(鵲巢)에 “까치에게 둥지가 있는데 비둘기가 차지하고 살도다[維鵲有巢 維鳩居之]” 한 데서 온 말이다. 유장【劉璋】익주 자사(益州刺史). 장송(張松)의 말을 믿고 조조를 멀리하고 유비(劉備)를 익주로 맞아들였다가 뒤에 유비의 모사들 책략에 의해 유비와 싸움 끝에 패하여 결국 문을 열고 항복하고 말았음. 《三國志 蜀志》 유장【儒將】유자(儒者)로서 장수가 된 사람. 학식이 고매하고 풍도가 유아(儒雅)한 장수를 말한다. 유적【褕翟】꿩을 그린 왕후의 제복(祭服)을 말한다. 유적【褕翟】꿩의 깃으로 장식한 오채(五彩)가 찬란한 왕후(王后)의 옷을 이른 말로, 전하여 왕후를 뜻한다. 유절【有截】유절은 “상토께서 열렬하시자 해외의 사방 제후들이 일제히 귀의하였다.[相土烈烈 海外有截]”에서 나온 말로 구주(九州), 천하(天下), 해외(海外) 등을 뜻하게 되었다. 《詩經 商頌 長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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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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