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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하【飮霞】신선은 원래 안개만을 먹고 산다 한다. 음하【陰何】옛날 남북조 시대에, 진(陳)의 시인인 음갱(陰鏗)과 양(梁)의 시인인 하손(何遜)을 말한다. 이 두 사람이 똑같이 시로 이름이 났다. 음하복【飮河腹】두더지[偃鼠]는 강물을 마셔도 제 배를 채우는 데에 불과하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逍遙遊》 음하영언복【飮河盈鼴腹】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두더쥐가 하수를 들이마신다 해도 배 채우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음화【陰火】습유기(拾遺記)에 “서해의 부옥산(浮玉山)에 큰 구멍이 있고 구멍 가운데 물이 있는데, 그 빛이 불과 같아 낮에는 밝지 않으나 밤에는 구멍 밖으로 불빛이 비치니, 이것을 ‘음화’라 한다.” 하였다. 읍【挹】손으로 물을 뜨다. 읍고【泣辜】읍고는 하우씨(夏禹氏)가 천자의 자리에 오른 뒤, 밖을 나갔다가 길에서 죄인(罪人)을 보고는 수레에서 내려,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물어보고 울면서 이르기를 “요순(堯舜) 시대 사람들은 요순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았는데, 과인(寡人)이 임금이 되자 백성들이 각각 마음을 달리 가지니, 과인이 매우 마음 아프다.” 한 데서 온 말이다.《史略 夏禹氏》 읍교【泣鮫】인어(人魚)인데, 남해 가운데 교인(鮫人)의 굴이 있으니 고기와 같이 물속에 살면서 베틀에서 늘 베를 짜는데, 울면 그 눈에서 구슬이 나온다 한다. 《述異記》 읍도궁【泣途窮】삼국 시대 위(魏) 나라 완적(阮籍)이 울분을 달래려고 혼자 수레를 타고 나갔다가 길이 막히면 문득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곤경(困境)에 떨어진 처지를 한탄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註》 읍루【挹婁】읍루는 만주의 혼동강(混同江) 일대에 사는 오랑캐이다. 읍리가다고【邑裏歌多袴】수령을 기리는 노래를 말한다. 후한(後漢)의 염범(廉范)이 촉군(蜀郡)의 수령(守令)으로 가서 폐단 많던 구제(舊制)를 개혁하여 새 법을 시행하니 백성의 살림이 넉넉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노래하기를 “예전에는 속옷도 없더니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이나 된다.”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문자이다. 《後漢書 廉范傳》 읍린【泣麟】노애공(魯哀公) 14년에 서(西)로 사냥가서 기린을 잡으니 공자(孔子)가 보고 울고 돌아와 그가 짓던 춘추(春秋)에, “西狩獲麟”이라 마지막으로 쓰고 붓을 끊었다. 읍린【泣麟】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는 뜻. 노 애공(魯哀公) 14년에 사냥하다가 기린을 잡았는데 공자(孔子)가 이를 보고 때아닌 때 기린이 나왔다는 것으로 춘추(春秋)의 집필을 그만두었다는 데에서 온 말이다. 읍백【揖白】집 이름.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시해하려던 일을 적극 반대한 박승종(朴承宗)의 아들 박자응(朴自凝)은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서궁(西宮) 즉 인목대비를 그리워하는 뜻에서 평소 거처하는 집을 읍백(揖白)이라 이름까지 하였다. 백(白은) 서방(西方)의 빛이니 서궁(西宮)을 가리키고, 읍(揖)은 읍례(揖禮)이니 서궁을 향해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다. 읍사【泣絲】읍사는 실을 염색하는 것을 보고 울었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철학자로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적(墨翟)이 일찍이 실을 염색하는 사람을 보고 울었는데, 그것은 흰 물감을 들이면 희어지고 누른 물감을 들이면 누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선(善)에 물들면 선하여지고 악에 물들면 악하여지기 때문에 악한 사람을 슬퍼하여 울었던 것이다. 《墨子 所染, 淮南子 說林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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