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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양【揖讓】송 태조(宋太組)가 군사들에게 추대(推戴)를 받아 진교역(陳橋驛)에서 군사를 돌려 들어와서, 주(周) 나라 공제(恭帝)에게 양위(讓位)하는 형식으로 나라를 차지하였다. 읍양【揖讓】요(堯)가 순(舜)에게 천하를 사양했고, 순(舜)이 우(禹)에게 천하를 사양하였다는 것이다. 읍옥【泣玉】초(楚) 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서 여왕(厲王)에게 바치니, 옥공(玉工)이 보고서 옥이 아니라 돌이라고 했다. 왕은 자기를 기만했다 하여, 그 왼쪽 발꿈치를 베었다. 그는 다시 그 옥을 무왕(武王)에게 바치니, 옥공이 보고서 역시 돌이라 했다. 그래서 왕은 그 바른쪽 발꿈치를 베었다. 그 후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그 박옥을 안고 형산 아래서 3주야를 울어서 눈물이 말라 피가 흐를 지경이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 물으니, 화씨의 말이, “나는 발꿈치가 없어져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옥을 돌이라 하는 것이 서러워서다.” 하니, 왕은 마침내 옥공을 시켜 그 박옥을 쪼개어 보옥(寶玉)을 얻었다. 《韓非子 卞和篇》 읍옥원【泣玉冤】전국 때 초(楚)의 변화(卞和)가 큰 옥덩이를 구하여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모두 가짜라 하여 양쪽 발을 베는 형벌을 받았었는데, 뒤에 문왕(文王) 때에야 옥으로 확인되었다. 읍옥화【泣玉和】변화(卞和)가 박옥(璞玉) 안고 울다.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읍읍【揖揖】“읍읍”이 아니라, 바른 음과 뜻은 읍읍【悒悒】근심하는 모양, 마음이 자유롭지 아니한 모양 읍읍【浥浥】향기가 떠도는 일 읍주인【泣珠人】읍주는 교인(鮫人)이 울면 눈에서 구슬이 나온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읍중가고【邑中歌袴】정사를 잘한다는 말. 후한서(後漢書) 권61에 “염범(廉范)이 촉군(蜀郡)에 태수로 나가 전임자의 까다로운 법령을 없애니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염범이 왜 이리 늦게 왔는가! 예전에는 적삼도 없더니 지금은 바지가 다섯이구나!’ 하였다.” 한다. 읍중검【邑中黔】춘추 시대 송(宋) 나라 어진 대부(大父)인 자한(子罕)을 말함. 송 나라 재상 황국보(皇國父)가 평공(平公)을 위해 대(臺)를 건축하느라 가을걷이에 방해가 되자, 자한이 가을걷이를 마친 다음에 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자 건축을 하는 자들이 노래하기를 “택문(澤門)에 사는 얼굴 흰 사람[황국보]은 실로 우리에게 일을 시키었고, 읍중의 얼굴 검은 사람은 실로 우리 마음을 위로해 주네.”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左傳 襄公十七年》 읍참마속【泣斬馬謖】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벰. 천하의 법도에는 사사로운 정이 있을 수 없음. 대의大義를 위하여 아끼는 사람을 버림. 삼국지(三國志)에서 유래한 말로, 촉한의 승상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아끼던 장수인 마속이 군령을 어기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다가 결국 군량의 보급로이자 요충지인 가정街亭을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빼앗겨 싸움에서 대패하여 후퇴하게 되자, 제갈공명은 눈물을 뿌리면서 군법대로 군령을 어긴 마속을 목베어(揮淚斬馬謖) 죄를 다스려 군법을 밝혀 사기士氣를 고무했다는 고사가 있다. 읍청당【挹淸堂】읍청은 김부의(金富儀)의 호이다. 읍청루【挹淸樓】읍청루는 숭례문(崇禮門) 밖 10리 거리에 있는 용산(龍山) 위에 있음. 읍취공【挹翠公】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을 말한다. 읍취헌【挹翠軒】박은(朴誾)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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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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