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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鼎彝】솥과 같은 기물(器物)로 왕가(王家)의 종묘(宗廟)ㆍ사당(祠堂)에 상시 비치해 두는 의물(儀物)이니, 골동을 말한다. 옛날 국가에 공훈이 있는 사람들의 사적을 여기에 새겼었다. 정이【鄭丈】정추만 지운(鄭秋巒之雲)의 자이다. 정인득해록【鄭人得駭鹿】열자(列子)에, “정나라 사람이 들에서 사슴을 잡아 죽여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파초 잎으로 덮어두고, 집에 왔다가 다시 가서 보니 사슴 덮은 곳이 어디인지를 잊어 버렸는데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다. 정인표【鄭仁表】당(唐) 나라 정인표(鄭仁表)가 “하늘의 상서(祥瑞)로는 오색 구름이 있고 사람의 상서로는 정인표가 있다.” 하며 자신의 문장을 과시했다 한다. 《唐書 卷一百八十二 鄭仁表傳》 정인홍【鄭仁弘】조선조 광해군 때 상신(相臣). 호는 내암(萊庵). 광해군 4년에 영의정이 되었는데, 폐비(廢妃)의 논(論)을 일으키고 포학(暴虐)한 일이 많았음. 문집으로는 내암집(萊庵集)이 있음. 정일【精一】정일집중(精一執中)의 준말인데,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나라를 전하면서 말하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謨》 정일두【鄭一蠹】일두는 조선조 학자 정여창(鄭汝昌)의 호. 자는 백욱(伯勗).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저서에는 용학주소(庸學註疏)ㆍ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등이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그의 부인이 모두 소각(燒却)했고, 지금은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遺集)이 일부 전할 뿐이다. 정일방구【正日放鳩】한단(邯鄲)의 백성이 정월 초하룻날 조간자(趙簡子)에게 비둘기를 선물로 바치니, 조간자는 그 비둘기를 날려보내면서 “은혜를 베푸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였다. 《列子 說符》 정일변미위【虞精一辨微危】정일집중(精一執中)의 준말인데,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순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謨》 정자【程子】낙양(洛陽) 사람. 정자【靜者】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학설에 통달하여 청정(淸靜)의 도를 깊이 터득하여 세상에 초연한 사람으로, 보통 은사(隱士)나 승려를 가리킨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심분(審分)에 “도를 얻은 자는 반드시 고요하게 되고, 고요하게 되면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得道者必靜 靜者無知]”라는 말이 있다. 정자【正字】정자는 홍문관, 승문원, 교서관의 정9품 벼슬이다. 정자산【鄭子産】춘추시대 정(鄭) 나라의 공손교(公孫僑)이다. 간공(簡公)ㆍ정공(定公)ㆍ헌공(獻公)ㆍ성공(聲公) 등 네 조정에 계속 재상으로 있으면서 뛰어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당시 패권다툼을 벌이는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 사이에 처한 정 나라를 무사하게 보전하였다.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에 자산이 외교문서를 잘 작성했다고 공자가 말한 내용이 있다. 정자용【鄭子容】자용은 정홍명(鄭弘溟)의 자(字)이다. 정자원【鄭紫元】자원(紫元)은 정두원(鄭斗源)의 자(字)이다. 정자정【鄭子精】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자이다. 정자중【鄭子中】정유일(鄭惟一)임. 호는 문봉(文峯)이고 퇴계 문인이다. 정자진【鄭子眞】한(漢) 나라 때의 은사(隱士) 정박(鄭樸)이다. 그는 도(道)를 닦고 입다물고 앉아서, 성제(成帝) 때에 대장군 왕봉(王鳳)이 예를 갖추어 맞이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곡구(谷口)의 산 밑에서 농사짓고 살다가 생을 마쳤다. 자호를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 하였음. 《漢書 高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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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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