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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終宵】밤새도록. 종소문【宗少文】남조 송 때의 은사 종소문(宗少文)은 본디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일찍이 서쪽으로 형산(荊山)ㆍ무산(巫山)을 다 올라 구경하고, 남쪽으로 형산(衡山)에 올랐다가 인하여 형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뒤에 병이 들자 강릉(江陵)으로 돌아와 탄식하기를 “늙고 병들어서 명산(名山)을 두루 구경하기 어려울 듯하니, 오직 누워서 유람을 하리라.” 하고는, 자신이 일찍이 유람했던 산들을 모두 방 안에 그려놓고 구경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南史 卷七十五》 종수【嵕岫】장안(長安) 가까이 있는 명산인 구종산(九嵕山)인데, 광릉(光陵)이 있는 양주(楊州) 주엽산(注葉山)을 말하기도 한다. 종수탁타전【種樹槖駝傳】유자후(柳子厚)가 지은 종수탁타전(種樹槖駝傳)에, “곽탁타라는 사람이 나무를 잘 가꿔 그 이치를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옮겨 심을 때에 뿌리를 펴고 본 땅의 흙을 가져오고 깊지도 얕지도 않게 적당하게 심어놓은 뒤에는 손대지 않아서 식물의 천성(天性)을 그대로 보존시킨다. 다른 사람들은 이와 반대이므로 옮겨 심은 나무가 잘 살고 번성하지 못하는데, 이 이치를 정치에 옮긴다면 관리가 백성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자주 나와 간섭하니 백성이 관리의 명령을 전하고 접대하기에도 바쁜데 어느 겨를에 농사짓고 일하겠는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종신국륜【宗臣國倫】종신은 명(明) 나라 때 문장가(文章家)이고 오국륜도 명 나라 때의 시인으로, 이들은 다 가정(嘉靖) 연간의 칠자(七子)로 유명하다. 종신모【終身慕】맹자(孟子)의 말에, “종신토록 부모를 생각하는 이는 오직 순(舜)이다.” 하였다. 종심【從心】70세. 마음을 따르다.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른 70세의 나이에는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도 결코 정도(正道, 법도, 도덕적 규범)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종씨시품【鍾氏詩品】종씨는 양(梁) 나라 사람 종영(鍾嶸), 자는 중위(仲偉). 시품(詩品)은 그가 한(漢)ㆍ위(魏) 이래의 시인 1백 3인의 작품을 상ㆍ중ㆍ하로 우열을 논해 놓은 것. 《梁書 卷四十九ㆍ南史 卷七十二》 종아채【從我蔡】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진채(陳蔡)의 땅에서 나를 따르던 이들이 다 문하(門下)에 있지 않다.” 하였다. 종야【終夜】“밤을 마치다”는 뜻으로 “밤을 지새우다”는 의미. 종어【鍾魚】풍경(風磬)을 말함. 종얼【宗孽】종자는 큰아들의 뜻으로 학문의 정통에 비하고 얼자는 서자라는 뜻으로 학문의 분열된 가지를 비한 것임. 종영【宗英】본디 종실(宗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의 뜻으로 쓰인다. 종영륵이【鍾英勒移】종산은 남경(南京) 동쪽에 있는 북산(北山)을 달리 이른 것이고, 이문(移文)은 공문(公文)의 일종이다. 남조 송(南朝宋) 때 주옹(周顒)이 처음 북산에 은거하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해염령(海鹽令)이 되었는데, 뒤에 임기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다시 북산을 들르려고 하자, 그의 친구인 공치규(孔稚圭)가 그의 벼슬길에 나간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북산 신령의 이름을 가탁하여 그를 거절하는 뜻으로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종산의 영령과 초당의 신령은 역로에 연기를 달려 보내서 산정에 이문을 새기게 하였다.[鍾山之英 草堂之靈 馳煙驛路 勒移山庭]”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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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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