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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칠일래【陽德七日來】양의 기운이 완전히 없어진 뒤 7일이 지나면 다시 양의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한다는 말로, 음과 양의 기운이 서로 순행하는 것을 뜻한다.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그 도를 반복하니 칠 일 만에 되돌아온다.[反復其道 七日來復]”하였다. 양도【兩都】강도(江都)와 송도(松都), 즉 경기 지방의 강화(江華)와 개성(開城)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도부【兩都賦】후한(後漢) 반고(班固)가 지은 동도부(東都賦)ㆍ서도부를 말한다. 전한(前漢)의 서도(西都) 장안(長安)과, 후한의 동도(東都) 낙양(洛陽)을 각기 치켜올린 부(賦)이다. 양동【瀼東】양동은 양수(瀼水)의 동쪽임. 두보가 기주에 있을 때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杜詩批解 卷二十 卜居, 夔州歌十絶句》 양동서【瀼東西】중국 기주부(夔州府)에 있는 양수(瀼水)의 동쪽과 서쪽 지역으로, 당 나라 두보(杜甫)가 그곳에서 남의 초가집을 빌려 살았다 하여 은거지를 뜻한다. 양두구육【羊頭狗肉】양의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팜. 겉모양은 훌륭하나 속은 변변치 않음을 말함. 겉으로 내세우는 말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 상반되거나 큰 차이가 있을 때, 즉 밖으로 표방하는 것과 실제로 추구하는 것이 전혀 달라 남을 속이는 격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양득의【楊得意】예전 한무제[漢武帝] 때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곤궁하게 지내는데, 그의 친구 양득의가 황제의 개 기르는 감독[狗獨]으로 있으면서, 황제에게 신의 고향 친구 사마상여가 부(賦)를 잘 짓는다고 추천하여 황제가 불러 보고 등용시켰다 한다. 양락【羊酪】양락은 양유(羊乳)로 만든 죽으로 고급 식품이다. 양락순갱【羊酪蓴羹】진(晋)나라 명사(名士)들 사이에 북방에는 양락(羊酪)이 맛이 있고 남방에는 순채(蓴菜) 국이 맛이 있다 하였다. 양래답소【羊來踏蔬】’채소를 밟는다.’ 함은, 곧, 어떤 사람이 항상 채소만 먹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양고기를 먹었더니, 그날 밤 꿈에 오장신(五臟神)이 나타나 이르기를 “양이 와서 채소밭을 밟아 버렸다.”고 하더라는 고사에서 나온 문자로, 채소만 먹다가 고기 맛을 보게 된다는 것을 익살스럽게 하는 말. 양량【悢悢】슬퍼하고 아파하는 모양, 불쌍히 여기어 돌보는 모양 양량【凉凉】친밀감이 없는 모양, 경솔한 모양, 서늘한 모양 양렴간【讓廉間】양렴은 양주(梁州)에 있는 양수(讓水)와 염천(廉泉)을 합칭한 말. 남조송(南朝宋)때 양주의 범백년(范柏年)이 송 명제(宋明帝)를 알현했을 적에 명제가 광주(廣州)의 탐천(貪川)을 언급한 다음 범백년에게 묻기를 “경(卿)의 고을에도 이런 물이 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양주에는 오직 문천(文川)ㆍ무향(武鄕)과 염천ㆍ양수가 있을 뿐입니다.” 하므로, 명제가 또 묻기를 “경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사는 곳은 염천과 양수의 사이입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南史 胡諧之傳》 양령오칠포【揚舲烏漆浦】오칠은 안장(鞍裝)의 별칭인 만큼 말을 치달렸어야 했는데 배를 탔다는 말이다. 송사(宋史) 여복지(輿服志)에 “자라원편(紫羅圓鞭)에 오칠안(烏漆鞍)”이라는 말이 있다. 양로【楊盧】화려한 문장으로 초당(初唐)을 풍미한 양형(楊炯)과 노조린(盧照隣). 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과 함께 당 나라 초기의 사걸(四傑)로 일컬어졌음.《唐書 卷二百一》 양록【楊麓】양구의 옛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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