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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閭社】마을. 여사【餘事】정치하는 여가에 글을 하므로 여사(餘事)라 하였다. 여산【廬山】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남쪽에 있는 유명한 산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그 남쪽에 아홉 줄기의 폭포가 있다 한다. 송 나라 때 주희(朱熹)가 남강군(南康軍)의 수(守)가 되어서 직접 학규(學規)를 만들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다. 《讀史方輿紀要 江西名山》 여산【廬山】여산은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동진(東晉) 때 고승(高僧) 혜원(慧遠)이 여기에 동림사(東林寺)를 세우고 혜영(慧永), 뇌차종(雷次宗) 등 18인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사(結社)하였으며, 고사(高士) 도잠(陶潛)이 여기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백거이 또한 낙양 동쪽의 향산에 많이 거처하여 보통 향산거사(香山居士)로 불리지만, “여산의 초당에서 밤비 소리를 들으며 홀로 묵다.[廬山草堂夜雨獨宿]”라는 등 여산의 추억을 담은 시도 적지 않다. 여산대하【礪山帶河】공신(功臣)을 봉(封)해 주는 맹세의 말인데, “황하의 물이 띠[帶]와 같이 줄고, 태산이 숫돌같이 작게 되도록 영원히 서로 나라를 보전하여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자.”는 것이다. 여산동작구【驪山銅作柩】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여산(驪山)에 장사지냈는데, 이때 구리로 널을 만들었다.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여산백련사【廬山白蓮社】불교 정토종(淨土宗)의 최초 결사(結社)로, 동진(東晉)의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승인(僧人)과 속인(俗人) 18명을 모아 염불하는 결사를 맺고서는 백련사(白蓮社)라고 하였다. 여산사【廬山社】백련사(白蓮社)를 가리킨다. 진(晉) 나라 때 혜원(慧遠)이 여산의 동림사(東林寺)에서 18명의 학승(學僧)들과 더불어 수업(修業)하면서 백련사라고 하였다. 여산삼소【廬山三笑】여산은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여기에 동림사(東林寺)가 있으며, 그 밑에 호계(虎溪)가 흐르는데, 동림사에 있던 고승 혜원법사(慧遠法師)는 손을 전송할 적에 한번도 호계를 지나지 않았으며 만일 이 호계를 지나면 범이 울부짖었으므로 호계(虎溪)라 하였다. 하루는 법사가 선비 도잠(陶潛)과 도사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모르는 사이 호계를 지나자, 범이 울부짖으니 세 사람은 크게 웃었다. 후인(後人)들이 삼소도(三笑圖)를 그려서 전하는 이가 있었다. 《廬山記》 여산옥예궁【驪山玉蘂宮】현종이 여산(驪山)에 별궁(別宮)을 짓고 양귀비를 데리고 온천(溫泉)에서 향락하였는데, 양귀비는 술이 얼근히 취하면 연꽃보다 더 고왔다. 여산정사【廬山精舍】진(晉) 나라의 고승(高僧) 혜원이 여산에 절을 세우고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했던 고사가 있다. 《梁 高僧傳 卷6》 여산지【驪山址】여산의 온천 터. 당 현종(唐玄宗)이 여산의 온천에 누차 행행하여 노닐면서 여기에 온천궁(溫泉宮)을 짓고 특히 총희(寵姬)인 양귀비(楊貴妃)를 여기에 머물게 했었다. 여산진면【廬山眞面】너무도 깊고 그윽하여 그 진면목을 알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여산하씨【閭山賀氏】여산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하씨는 하흠(賀欽)을 말한다. 하흠은 명 나라 때의 사람으로, 자가 요공(堯恭)이다. 요동 광녕(廣寧) 사람으로 진백사(陳白沙)가 강론하는 것을 듣고는 그날 즉시 벼슬자리를 내던지고 가서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 뒤에 의무려산으로 들어가서 이학(理學)에 전념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감화시키니, 사람들이 의려선생(醫閭先生)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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