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영로【郢路】영도로 가는 길 영록주【酃醁酒】중국 형양현(衡陽縣) 동쪽에 있는 영호(酃湖)의 물로 빚은 미주(美酒)의 이름이다. 영롱팔창【玲瓏八窓】당(唐) 나라 노륜(盧綸)의 시 ‘부득팽조루송양덕종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德宗歸徐州幕)’에 “네 개의 문에 여덟 개의 창 어찌 밝은지, 영롱해라 하늘 기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오네.[四戶八窓明 玲瓏逼上淸]”라는 표현이 있다. 영류【零柳】체질이 매우 유약함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고열(顧悅)이 간문제(簡文帝)와 같은 나이로 머리가 일찍 희었으므로, 간문제가 이르기를, “경이 어찌하여 먼저 희었는고?" 하니, 고열이 대답하기를, “포류(蒲柳)의 자질은 가을을 바라만 보고도 잎이 먼저 머리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言語》 영륜【伶倫】황제(黃帝) 때의 악관(樂官)으로 대피리[竹笛]의 명수이다. 곤륜산(崑崙山)의 대나무를 가져다가 처음으로 악률(樂律)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릉【零陵】진 공제(晉恭帝)를 말함. 유유(劉裕)가 원희(元熙) 원년에 공제를 폐하여 영릉왕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해에는 마침내 공제를 시해하고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국호를 송(宋)으로 했었다. 영릉【零陵】순(舜) 임금을 장사 지냈다는 중국의 옛 지명이다. 영릉【永陵】영조(英祖)의 아들인 경의군(敬義君)의 묘. 후에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영릉【英陵】우리나라 세종대왕을 말함. 영릉【零陵】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지명으로 창오산(蒼梧山)과 소상강이 있다. 그곳에서 석종유가 나온다. 영릉복유【零陵復乳】없어졌다고 한 것이 다시 생겨남. 영릉(零陵)에서 생산되는 석종유(石鍾乳)를 공물(貢物)로 바치는데, 그것을 채취하기가 너무 힘이 들고 게다가 정당한 보상도 없이 괴롭기만 하여 지방민들이 석종유가 다 없어졌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최민(崔敏)이 자사(刺史)로 와서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은 그에 감복하여, 석종유가 이제 다시 생겨났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유종원(柳宗元)의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 영릉유혈【零陵乳穴】국가에서 뇌록을 공물(貢物)로 책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시달림을 받지 않고 뇌록은 뇌록대로 흥청망청 있음. 중국 영주(永州) 영릉현(零陵縣)에서 석종유(石鍾乳)가 생산되는데, 국가에서는 그것을 공물로 받았기 때문에 해마다 힘들여 그것을 채취하고서도 별 보상도 받지 못한 지방민들이 그에 싫증을 느끼고는, 그곳 석종유가 이제 바닥이 나고 없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그 후 5년이 지나서 최민(崔敏)이 영주 자사(永州刺史)로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자 그곳 백성들이, 이제 석종유가 되살아났다고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유종원(柳宗元)의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 영만지구【盈滿之咎】가득 차면 기울고 넘친다. 만사가 다 이루어지면 도리어 화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영매【嶺梅】기후의 차이에 따라 남쪽과 북쪽의 개화(開花) 시기가 다르다는 대유령(大庾嶺)의 매화로, 옛날 친지들끼리 서로 매화꽃 가지를 부쳐주던 풍속이 있었다. 영매【迎梅】영매우(迎梅雨)의 준말로, 중국 강남(江南) 풍속에 의하면, 음력 3월에 내린 비를 영매우라 하고 5월에 내린 비를 송매우(送梅雨)라 하였다. 영매우【迎梅雨】음력 3월에 내리는 비.
10/20/30/40/50/60/70/80/90/100/10/20/30/40/50/60/70/80/90 200/10/20/30/40/50/60/70/80/90/300/10/20/30/40/50/60/70
|
|
|
|
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
|
|
|
||
Copyright (c) 2000 by Ansg All rights reserved <돌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