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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국【玉局】송대(宋代)의 저명한 도관(道觀)인 옥국관(玉局觀)으로, 소동파(蘇東坡)가 영주(永州)에서 사면을 받고 돌아와 옥국관 제거(提擧)가 되어 한가하게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옥국【玉局】중국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에 있는 도관(道觀). 송(宋)의 소식(蘇軾)은 옥국제거사(玉局提擧司)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소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원래는 도관(道觀)을 가리키는데, 사찰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옥국【玉局】촉중(蜀中)에 산중에 신선이 옥 바둑판에 바둑을 두었다는 유적(遺蹟)이 있다. 옥급【玉笈】옥급은 옥으로 장식한 책상자로 진기한 책을 담아 놓은 상자에 대한 미칭임. 또는 도가의 비결을 뜻한다. 옥녀【玉女】시경(詩經) 대아(大雅) 민로(民勞)에 “왕이 너를 보배로 여기시니 내가 이렇게 간하노라[王欲玉女 是用大諫]”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곧 주(周) 나라 소목공(召穆公)이 당시에 못된 소인들이 유왕(幽王)의 마음을 흐리게 하여 총애를 받아 권세를 도둑질하므로 이를 꾸짖어 읊은 노래이다. 옥녀【玉女】옥녀는 선녀(仙女)를 가리킨다. 아름다운 기생. 옥노【玉奴】옥노는 남재(南齋) 동혼후(東昏侯)의 비(妃) 반씨(潘氏)의 소자(小子)이다. 그녀에게 혹하여 나라가 망했으나 그녀는 순절(殉節)했다. 옥당【玉堂】옥당은 옥으로 꾸민 집으로 신선이 산다는 집이다. 옥당【玉堂】홍문관(弘文館)을 화려한 벼슬이란 뜻으로 옥당(玉堂)이라 한다. 옥당상화【玉堂賞花】명(明) 나라 선종(宣宗)이 문연각(文淵閣)에 거동하여 담홍색의 작약 한 그루를 심도록 명했고, 경제(景帝) 초년에 또 순백색(純白色)과 심홍색(深紅色)의 작약 두 그루를 더 심도록 하였는데, 뒤에 학사(學士) 이현(李賢)이 이 세 그루 작약을 두고 여러 사람들과 시를 짓고는 ‘옥당상화집(玉堂賞花集)’이라고 명명했다 한다. 《群芳譜》 옥당서【玉堂署】한(漢) 나라 때 학사(學士)들이 황제의 명을 기다리던 곳이다. 한림원(翰林院) 혹은 한림 학사(翰林學士)를 가리킨다. 옥대【玉帶】벼루의 일종으로 절강성(浙江省) 상산현(常山縣)에서 생산되는데 자석(紫石) 속에 백색의 무늬 한 가닥이 둘러있으므로 옥대연(玉帶硯)이라 이름을 붙였음. 혹은 자포옥대(紫袍玉帶)라고도 함. 옥도【玉道】성곽 주위를 둘러싸고 흐르는 물줄기를 말한다. 옥동【玉童】선동(仙童)으로, 서왕모(西王母)가 여러 신선들과 원구(員丘)에서 놀 적에 옥동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옥동서【玉東西】술잔을 말한다. 송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차운길로십소시(次韻吉老十小詩)’에, “가인은 두남북이요, 미주는 옥동서라.[佳人斗南北 美酒玉東西]”하였다. 옥두【玉斗】옥두는 옥으로 만든 술을 뜨는 구기임. 옥두쇄【玉斗碎】항우(項羽)와 패공(沛公)이 홍문(鴻門)에 모여서 잔치할 때에,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패공을 죽이기를 권하였으나 항우가 듣지 않았다. 패공이 빠져 나간 뒤에 장량(張良)을 시켜 옥두(玉斗)를 범중에게 선사하니 범중이 칼로 옥두를 쳐서 깨치며, “항왕(項王)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일 것이며, 우리들은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 옥두쇄시휴백업【玉斗碎時虧伯業】옥두는 옥으로 만든 술잔. 항우(項羽)는 이것을 범증(范增)에게 주었었는데, 홍문연(鴻門宴) 잔치에서 범증은 항우에게 유방(劉邦)을 죽일 것을 청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자, 노하여 옥두를 깨뜨렸다. 그 후 항우는 유방에게 패하여 오강(烏江)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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