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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방강【翁方綱】옹방강은 청 나라 때 금석학자(金石學者)인데, 고종(高宗)때 진사 급제한 후 벼슬은 내각 학사(內閣學士)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금석(金石)ㆍ보록(譜錄)ㆍ서화(書畫)ㆍ사장(詞章)의 학에 정진하였으며, 그의 서법(書法)은 당시 천하제일이었다고 한다. 옹북하【甕北河】우리 나라 사신이 육로로 북경을 오갈 때 건너는 강으로, 소장령(小長嶺)과 대장령(大長嶺) 사이에 있으며, 삼가하(三家河)라고도 한다. 옹비음【擁鼻吟】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이 낙하서생영(洛下書生詠)을 읊을 적에 비질(鼻疾)이 있는 관계로 소리가 탁(濁)하였는데, 당시의 명류(名流)들이 그것을 본받으려 해도 되지 않으므로, 혹은 손으로 코를 가리어 그 소리를 흉내냈던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소리를 길게 빼는 우아한 음영(吟詠)을 뜻한다. 옹비음【擁鼻吟】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이 비질(鼻疾)이 있어 시를 읊으면 소리가 탁하였는데, 당시의 명류(名流)들이 오히려 그 소리를 좋아하여 흉내를 내려 하였으나 되지 않으므로, 혹자는 일부러 손으로 코를 가리고서 그 소리를 흉내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晉書 謝安傳》 옹산【甕算】옹산은 망령된 계산을 말함. 옛날 가난한 옹기 장사가 옹기 속에서 자며 꿈속에 부자가 되어 기뻐하다 옹기가 깨졌다는 고사가 있다. 옹산성【甕山城】신라 태종왕(太宗王) 8년에 백제(百濟)의 남은 세력이 옹산성을 점거하고 있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 항복하지 않아 김유신(金庾信)이 가서 포위를 하고 백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장 항복만 하면 앞으로의 부귀를 약속하겠다.” 하였으나, 성장(城將)이 대답하기를, “성은 비록 작지만 병력도 먹을 것도 다 충분하고 군대들도 다 정의롭고 용감하다.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은 않겠다.” 하니, 유신이 그 성을 함락시키고 그 성장을 잡아 죽였다. 옹성산【甕城山】동복현(同福縣) 북쪽에 있는데, 산에 세 바위가 있어 모양이 독과 같이 우뚝하게 서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옹성원【翁星原】성원은 청 나라 옹수곤(翁樹崑)의 자인데 옹방강의 아들로서 추사와 지교(知交)였으며, 그의 서옥을 성추하벽지재(星秋霞碧之齋)라 하였는데 성은 성원(星原), 추는 추사(秋史), 하는 신자하(申紫霞), 벽은 유정벽(柳貞碧)을 말함. 그리고 추사를 위하여 홍두산장(紅豆山莊)에 대자(大字)의 편액을 친히 써서 기증하였음. 옹손【饔飱】옹손은 아침밥과 저녁밥으로 음식 대접을 뜻한다. 옹수양아【擁樹兩兒】양아는 효혜(孝惠)와 노원(魯元)을 가리킨 말이고, 옹수는 보호하였다는 말이다. 한왕(漢王)이 항우(項羽)의 공격을 받고 쫓길 때 위급하게 되자 함께 타고 가던 효혜와 노원 두 아이를 버리려 하였는데, 하후 영(夏侯嬰)이 이들을 보호하여 무사하게 되었다. 《史記 卷四十一 樊酈滕灌列傳》 옹옹【滃滃】구름이 성한 모양, 술이 진한 모양 옹옹【廱廱】화락한 모양. 옹옹【喁喁】웃사람의 덕을 기리고 우러러 따르는 모양, 웃사람이 즐거워하는 모양, 입을 위로 쳐들고 몹시 기다리는 모양. 물고기가 입을 위로 내밀고 오물거리는 모양 옹유【甕牖】가난한 집에서 깨어진 독아가리로 낸 창을 말한다. 옹유승추【甕牖繩樞】깨진 항아리로 창문을 만들고 새끼로 지도리를 맨다는 뜻으로 미천함을 비유한 말이다. 《賈誼 過秦論》 옹인【甕人】문견이 좁은 사람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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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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