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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척【枉尺】진대(陳代)가 맹자에게 말하기를, “한 자를 굽혀서 열 자를 바르게 할 수 있으면[枉尺直尋]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하였는데, 그것은 몸을 굽히더라도 제후(諸侯)를 보아서 세상을 구제하라는 뜻이다. 맹자는, “몸을 굽혀서까지 남을 바르게 할 수는 없다.” 하였다. 왕청【王淸】자유의 청고. 자유(子猷)는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휘지(徽之)의 자임. 휘지는 성격이 활달하고 남에게 얽매이지 않아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였다. 일찍이 대규(戴逵)를 찾기 위하여 눈내리는 날 밤에 섬계(溪)에 배를 띄웠다가 그의 집 문 앞까지 가서는 흥이 다했다 하여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올 정도로 낭만을 즐겼음. 《晉書 卷八十》 왕춘【王春】왕춘은 공자가 춘추(春秋)를 편찬할 때 주(周)나라 왕실을 높이고 대일통(大一統)의 사상을 표시하기 위해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 조(元年條)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쓴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은공(隱公)의 원년(元年)은 곧 주 나라 천자의 춘정월(春正月)이 된다는 뜻으로 주 나라를 높인 것이라 한다. 왕충재【王充才】후한(後漢) 때 왕충이 집이 매우 가난하여 서책을 구입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항상 낙양(洛陽)의 서사(書肆)에 노닐면서 그 파는 책들을 한 번 죽 훑어보고는 다 외어버림으로써 마침내 박학 다식한 대유(大儒)가 되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四十九》 왕침【王沈】왕침의 자는 언백(彦伯)인데, 어려서부터 준재(俊才)를 지녔으나 출신이 한미하고 시속에 따라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권귀(權貴)의 제재를 받아 벼슬은 군(郡)의 문학연(文學椽)에 그쳤다. 《晉書 卷九十二》 왕태부【王太傅】진 성제(晉成帝) 때 태부 벼슬을 지낸 당시의 명상(名相) 왕도(王導)를 가리킨다. 가뭄이 크게 들었을 때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완강하게 버티다가 황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서를 내리며 간곡히 요청하자 나와서 일을 보았음. 왕태위【王太尉】왕태위는 진 나라 때 여러 요직을 거쳐 벼슬이 태위에 이른 왕연(王衍)을 가리키는데, 그가 태위에 올랐을 적에 뭇 사람이 그를 원수(元帥)로 추대하자, 구적(寇賊)의 토벌을 감당치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사양하여 말하기를, “나는 조금도 벼슬할 뜻은 없었으나 직첩(職牒)에 따라 옮기다가 마침내 이 지위에 이르게 되었는데, 오늘날의 일을 어떻게 나 같은 비재(非才)로 처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晉書 卷四十三》 왕통【王通】수(隋)나라 강주(絳州) 용문(龍門) 사람으로 자는 중엄(仲淹)인데, 촉군 사호서좌(蜀郡司戶書佐)를 지내다가 그만두고 돌아와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저술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한다. 왕패궤대【王霸詭對】후한(後漢) 왕패(王霸)가 광무제(光武帝)를 따라 전장에 나가서 호타하(滹沱河)를 건너려 할 때 척후병이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다고 보고해 오자 광무의 명을 받고 왕패가 재조사하러 나가게 되었다. 이때 왕패가 사람들이 걱정할까 염려하여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고 거짓말로 답변했는데 뒤에 군대가 현장에 도착해 보니 그동안에 얼음이 얼어 건널 수 있었다는 고사이다. 《後漢書 王霸傳》 왕포【王褒】한 선제(漢宣帝) 때의 문장가인 왕포. 자는 자연(子淵)이다. 왕풍추【兀風椎】남사(南史) 권25에 “무제(武帝)가 바둑 두기를 즐겨하여 늘 도개와 대국을 벌였는데, 어떤 때는 밤을 새웠으므로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자 무제가 ‘초상집의 개 같고 바람에 흔들리는 방망이 같다.’는 시를 지어 조롱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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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 잡문 / 한시 / 한시채집 / 시조 등 / 법구경 / 벽암록 / 무문관 / 노자 / 장자 /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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