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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鴛鴦】물새의 일종으로 깃털이 아름다움. 늘 암수가 함께 붙어 다니기 때문에 흔히 금슬 좋은 부부에 비유됨. 원앙계수당【袁盎戒垂堂】수당은 마루 끝에 앉아 있는 것. 한 문제가 장안(長安)동쪽 패릉(霸陵)위에서 수레를 몰아 험난한 언덕을 내달려 내려가려 하자, 원앙이 말고삐를 잡고 간하기를 “신은 듣건대 천금을 가진 집 자식은 마루 끝에 앉지를 않고 백금을 지닌 집 자식은 난간에 몸을 기대지 않으며, 성군은 위험한 것을 타지 않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험한 산길을 고려치 않고 말을 달리려 하시니 만일 말이 놀라 수레가 넘어지는 날이면, 폐하 자신의 몸이야 하찮게 보신다 하더라도 고조(高祖)의 사당과 태후(太后)를 장차 어찌 하시겠습니까.”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四十九 袁盎傳》 원앙기【鴛鴦機】부녀자들의 자수(刺繡)하는 수틀을 말함. 원앙루【鴛鴦樓】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누방(樓房)을 말한다. 원앙와【鴛鴦瓦】부부간의 금슬이 좋기로 유명한 원앙 모양으로 짝을 이룬 암키와와 수키와를 말한다. 원앙지계【鴛鴦之契】금슬(琴瑟)이 좋은 부부사이 원약허【元若虛】약허는 원유진(元有鎭)의 호. 원양【原壤】노(魯) 나라 사람인데 공자의 친구이며 예법을 도외시한 사람. 그가 공자의 앞에 걸터앉아 기다리니, 공자가 지팡이로 그 정강이를 두드리며, “어려서는 공손하지 못하고, 자라서는 들먹일 만한 것이 없고, 늙어도 죽지 않으니 이것이 적(賊)이라.” 하였다. 논어(論語) 원역【遠役】국가의 임무를 띠고 먼 지방에 가는 것을 말함. 원예【元禮】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인 이응(李膺)의 자(字). 한서(漢書) 이응전(李膺傳)에 “천하의 규범은 이원례다.[天下模楷李元禮]" 하였다. 원예방참【圓枘方鏨】네모난 끌 구멍에 넣으면 서로 어긋나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원외【員外】원외는 정한 관리 외의 직책을 맡은 사람. 원우【元祐】송(宋) 나라 철종(哲宗)의 연호로, 이 당시에 당론(黨論)이 아주 심하여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頤), 황정견(黃庭堅) 등의 구파(舊派)와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신파(新派)가 심하게 대립하였으며, 그 뒤에 왕안석의 우익인 채경(蔡京), 증포(曾布) 등에 의하여 구파가 간당(奸黨)으로 몰려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원우【元祐】치열했던 당쟁(黨爭)의 와중(渦中)을 말한다. 송 신종(宋神宗) 때 사마광(司馬光)의 구당(舊黨)과 왕안석(王安石)의 신당(新黨)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는데, 이를 역사에서 원우 당인(元祐黨人)이라고 일컫는다.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원우 연간인 송 나라 철종(哲宗) 때 당론(黨論)이 아주 심하여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頤), 황정견(黃庭堅) 등의 구파(舊派)와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채경(蔡京), 증포(曾布) 등의 신파(新派)가 심하게 대립하였는데, 휘종(徽宗) 때에 이르러 채경 등이 용사(用事)하면서 구파를 당인으로 몰아 태학문(太學門) 앞에다가 사마광 등 309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우고는 당인비(黨人碑)라고 하였다. 원우간비【元祐姦碑】원우는 송 철종(宋哲宗) 연호. 당시에 사마광(司馬光)을 필두로 하여 정이(程頤)ㆍ문언박(文彦博) 등 문인 학자 1백여 명이 한 무리가 되어 왕안석(王安石)의 신당(新黨)과 격렬한 대립을 보여왔는데, 그 후 휘종(徽宗) 대에 와서 증포(曾布)ㆍ채경(蔡京) 등이 이상의 문인 학자들을 원우간당(元祐姦黨)으로 몰아 단례문(端禮門)에다 원우간당비를 돌에 새겨 세웠음. 《元祐黨人傳》 원우죄인【元祐罪人】원우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인데, 원우의 죄인이란 소식을 말함. 소식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였으므로 숭령(崇寧) 원년에 채경(蔡京)이 사마광(司馬光)의 구당(舊黨) 1백 2십 명을 간당(奸黨)이라 지목하고 비를 세웠음. 원우퇴설루【袁尤槌雪樓】원굉도는 바로 명(明) 나라 때의 시인이고, 설루(雪樓)는 역시 명나라 때의 시인 이반룡(李攀龍)의 서실(書室) 이름인 백설루(白雪樓)의 준말이다. 원굉도는 본디 시문에 뛰어난 사람으로서 그의 형인 종도(宗道), 아우인 중도(中道)와 함께 모두 당대에 명성이 높았는데, 그는 특히 왕세정(往世貞)과 이반룡의 시체(詩體)를 매우 강력히 배격하고 홀로 일가를 이룸으로써 당대에 많은 학자들이 왕세정ㆍ이반룡을 배제하고 그를 따르면서 그의 시체를 공안체(公安體)라 지목했던 데서 온 말이다. 《明史 卷二百八十八》
10/20/30/40/50/60/70/80/90/100/10/20/30/40/50/60/70/80/90 200/10/20/30/40/50/60/70/80/90/300/10/20/30/40/50/6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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