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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劉煦】오대(五代) 후진(後晉)의 사람인데 당서(唐書)를 편찬하면서 당 태종(唐太宗)의 정치가 주(周) 나라의 성왕(成王)ㆍ강왕(康王)에 합한다고 칭찬하였다. 유후【留侯】유후는 장량(張良)의 봉호(封號)이다. 장량은 한(韓) 나라에서 5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가문의 출신으로, 진(秦) 나라가 조국을 멸하자, 창해 역사(蒼海力士)로 하여금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秦始皇)을 저격(狙擊)하게 하기도 하였으며, 뒤에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케 하였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한 고조가 천하를 통일하고 공신을 열후로 봉할 적에, 장량을 유후로 봉하였다.” 하였다. 유후개벽곡【留侯豈辟穀】유후(留侯)는 한(漢) 나라 장량(張良)의 봉호(封號)이다. 장량이 어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신선술(神仙術)이나 닦으려 했었겠느냐는 뜻이다. 벽곡(辟穀)은 신선술의 하나로서 곡식 대신 솔잎이나 대추ㆍ밤 등을 조금씩 먹고 사는 것이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를 보면, 장량이 벽곡하는 법을 배우며 도인(導引)과 경신술(輕身術)을 행하다가, 고조(高祖)가 죽은 뒤 여후(呂侯)의 간청에 못이겨 다시 곡식을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 유후나용한승상【留侯那用漢丞相】유후는 한 고조(漢高祖)의 승상(丞相) 장량(張良)의 봉호.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한(韓) 나라의 대신(大臣)이었는데, 진(秦) 나라에 의해 한 나라가 망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박랑사(博浪沙)에서 역사(力士)를 시켜 철퇴(鐵椎)로 진 시황을 저격했으나 실패했다가, 뒤에 한 고조를 도와 끝내 진 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업(漢業)을 일으킨 다음에는 은퇴하고 말았다. 즉 장량은 부귀영화에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적이 다른 데에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漢書 卷四十》 유후노경치【留侯老更癡】한(漢) 나라 장량(張良)이 유후(留侯)로 봉하여졌다. 장량이 만년에 신선을 배운다고 벽곡(辟穀)을 하였다. 유후촌【劉後村】후촌은 송(宋) 나라 유극장(劉克莊)의 호. 그는 특이한 재질이 있어 문장을 잘했으며, 학문은 고금(古今)을 통하고 소아체(騷雅體)의 시사(詩詞)를 하였다. 저서로는 후촌거사집(後村居士集) 전(前)ㆍ후(後)ㆍ속(續)ㆍ신(新)의 4집(集)이 있다. 《宋元學案 卷四十七》 유흠【劉歆】유흠은 한(漢) 나라의 대학자 유향(劉向)의 아들로, 부친의 업을 계승하여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고문(古文)을 혹독히 좋아하여 금문(今文)의 학자들과 심한 갈등을 빚은 나머지 하내 태수(河內太守)를 자청하여 몸을 피하기도 하였다. 유희【庾羲】진(晉) 나라 사람으로 자는 의숙(義叔). 목제(穆帝)에게 풍간(諷諫)하는 시를 지어 올려 명망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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