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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설【潤下說】물은 윤택하고 내려간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周書 洪範에 “1은 오행(五行)이니 첫째는 수(水)이고……수는 윤하(潤下)한다.” 하였다. 윤현【尹鉉】자는 자용(子用), 호는 국간(菊磵), 본관은 파평이다. 윤관의 16대손이다. 1537년 식년문과에 장원하고, 광주목사, 형조참판, 호조판서를 역임했다. 청렴한 성품이었으나, 치산(治産)과 이재(理財)에 밝아 벼슬길에서 흥미로운 일화를 많이 남겼다.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외면하지 않고 시로 형상화 했다. 특히 1천자가 넘는 장시 영남탄(嶺南歎)이 유명하다. 문집에 국간집(菊磵集) 3권 1책이 있다. 윤화정【尹和靖】정이천의 문인으로 이름은 돈(焞), 자는 언명(彦明), 호는 화정처사(和靖處士). 저서에는 논어해(論語解)와 화정집(和靖集)이 있음. 윤회【輪回】불가의 용어인데, 중생(衆生)이 최초로부터 육도(六道) 속에서 전정하고 생사하지 않는 자 없어 마치 수레바퀴가 회전하는 것 같이 간단될 때가 없으므로 윤회(輪回)라 칭하였음. 오직 성도(成道)한 자만이 이 괴로움을 면함. 윤회【尹淮】세종 때의 명신.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벼슬이 병조 판서ㆍ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음. 신장(申檣)과 함께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했고,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을 맡기도 했음. 저서에는 청경집(淸卿集)이 있음. 윤회전생【輪回轉生】생사를 반복 해감을 말함. 윤효손【尹孝孫】조선조 세종ㆍ연산 연간의 문신. 자는 유경(有慶), 호는 추계(楸溪). 성종 1년에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오례의주(五禮儀註)를 수찬하고, 그 뒤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음. 윤희【尹喜】주대(周代)의 사람. 함곡관(函谷關)의 관리로 있으면서 노자(老子)가 그곳을 지날 것을 미리 알고 대기하고 있다가 과연 노자를 만나고 노자로부터 도덕경(道德經)을 전수받고는 그에 심취되어 노자를 따라 서쪽으로 간 후, 어느 곳에서 죽은 줄을 모른다고 함. 《史記 卷六十三》 율관【律管】율관(律管)은 고대에 절후를 관측하던 기구로, 대나무나 금속으로 만들며, 모두 12개로 이루어졌다. 밀실에 이 율관을 놓아두고 갈대를 태운 재를 채운 다음 흰 천을 덮어 두면 절후가 바뀔 적마다 한 개의 율관씩 재가 올라와서 천에 달라붙는다고 한다. 율려【律呂】옛날에 악률(樂律)을 바로잡는 기구로, 대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열두 개의 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율률【慄慄】두려워하는 모양, 매우 추운 모양 율률【栗栗】두려워하며 삼가는 모양, 많은 모양 율리【栗里】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지명인데, 도잠(陶潛)이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뒤에는 흔히 고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율리구거양류재【栗里舊居楊柳在】도연명(陶淵明)이 율리(栗里)에 은거(隱居)하면서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 율리송국【栗里松菊】율리는 진(晉) 나라의 처사(處士)인 도연명(陶淵明)이 은둔한 곳으로, 도연명은 일찍이 소나무와 국화를 좋아하였다. 그가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남아있다.[三徑就荒 松菊猶存]”고 읊은 내용이 유명하다. 율리시붕【栗里詩朋】율리는 동진(東晉) 때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고향으로, 전하여 도잠을 가리킨 말인데, 도연명집(陶淵明集)에 의하면 도잠이 방참군(龐參軍)ㆍ대주부(戴主簿)ㆍ곽주부(郭主簿) 등과 시를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 있다. 율리원【栗里園】율리는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고향으로,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산을 날로 거닐어 정취를 이루다[園日涉以成趣].”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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