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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양전【二頃良田】전국 시대의 유세가(遊說家) 소진(蘇秦)이 “가령 내가 낙양성 교외의 비옥한 토지를 두 이랑 정도만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을 한 몸에 찰 수가 있었겠는가.[且使我有洛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라고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69 蘇秦列傳》 이경여【李敬輿】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24세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흥원강 가에서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왕의 미움을 사 삼수에 귀양간 일이 있다. 이경전【李慶全】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608년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옹립 하는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다 강계(江界)로 유배 갔다. 광해군 즉위 후 충청도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청했다.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637년(인조 15) 삼전도(三田渡)의 비문(碑文) 작성의 명을 받았으나 병을 빙자하고 거절했다. 1640년 형조판서를 지냈다. 시문으로 어려서부터 명성이 높았다. 문집에 석루유고(石樓遺稿)가 있다. 이경전【二頃田】한평생 먹고 살 만한 기름진 토지를 말한다. 전국 시대에 6국의 재상이 되었던 소진(蘇秦)이 “가령 내가 낙양성과 가까운 곳에 좋은 땅 두 마지기만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여섯 나라 정승의 인을 꿰어 찰 수 있었겠는가.[且使我有洛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蘇秦列傳》 이경함【李景涵】경함은 이발(李潑)의 자(字)이다. 이계【二戒】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말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천하에 큰 계명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명(命)이고 하나는 의(義)이다.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이 명(命)이니, 마음속에서 잠시라도 놓을 수 없는 것이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의(義)이니, 어디를 간들 임금이 없는 곳은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계수【李季受】이계수는 이석인(李錫仁)으로, 계수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경주, 덕형(德馨)의 5대손이며, 현종 9년(1668)에 태어나 영조 5년(1729)에 죽었다. 이계장【李桂長】고려(高麗)의 문신(文臣)으로 청주인(淸州人)이다. 희종(熙宗) 7년에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과거(科擧)를 관장하였다. 《高麗史》 이고개분【狸膏芥粉】삵괭이 기름과 겨자가루. 이곡화양춘【俚曲和陽春】자신의 변변치 못한 시문으로 상대방의 훌륭한 시문에 화답함을 겸칭하는 말. 이곡은 저속한 이속(俚俗)의 가곡(歌曲)으로 자신의 시문을 비유한 말이며, 양춘은 유명한 곡명으로 상대방의 시문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황경전(黃瓊傳)에 “양춘곡(陽春曲)에는 화답하는 자가 반드시 드물다.”는 말이 있다. 이공【貳公】찬성(贊成)의 별칭이다. 이공린【李公麟】송(宋) 나라 때 문인화가(文人畫家). 호는 용면(龍眠)이다. 이공봉【李供奉】이공봉은 당 현종(唐玄宗) 때 한림공봉(翰林供奉)을 지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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