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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林椿】고려 때의 문인(文人)으로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이며, 특히 당시(唐詩)에 뛰어났었다. 임춘각【臨春閣】남조(南朝) 진 후주(陳後主)의 화사했던 누각(樓閣). 여기서 비빈(妃嬪)ㆍ궁녀(宮女)들과 함께, 가무성색(歌舞聲色)에 탐닉 되었다가 나라가 망했다. 임춘각【臨春閣】진 후주(陳後主) 지덕(至德) 2년에 광소각(光昭閣) 앞에 결기(結綺)ㆍ임춘(臨春)ㆍ망선(望仙)의 세 누각(樓閣)을 세웠는데, 모두 침단향목(沈檀香木)으로 구조(構造)하였고 금은 보옥으로 장식하였으며, 기화요초(奇花瑤草)를 심어 사치를 다하였다. 후주(後主)는 임춘각에 거처하고 장 귀비(張貴妃)는 결기각에 거처하였으며, 공(龔)ㆍ공(孔) 두 귀빈(貴嬪)은 망선각에 거처하였다. 《南史 張貴妃傳》 임치【臨淄】현재의 산동성(山東省) 광요현(廣饒縣) 남쪽에 있는 곳으로 제(齊) 나라의 서울이었다. 《戰國策 齊策》 임타【任他】마음대로 하게 한다는 뜻. 종타(從他)ㆍ빙타(憑他). 임포【林逋】송(宋) 나라 때의 은사(隱士)로 화정선생(和靖先生)이라고도 한다. 임포는 자가 군복(君復)인데,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해 살면서 20년 동안 성시(城市)로 나오지 않았다. 서화를 잘 그리고 시를 잘 지었으며,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두지 않은 채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면서 지냈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宋史 卷457 隱逸列傳上 林逋》 임포서호악【林逋西湖樂】송(宋)의 은사(隱士).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20년 은거했다. 매화와 학을 몹시 사랑하였다. 임풍【林風】한가한 은거 생활 임하인【林下人】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쉬는 사람을 말한다. 당(唐)나라 중 영철(靈澈)이 위단(韋丹)에게 지어 준 시에, “서로 만나면 다 벼슬을 쉬고 간다지만, 임하(林下)에야 어디 한 사람이나 보이더냐[相逢盡道休官去 林下何會見一人].” 하였다. 임하풍【林下風】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의 질녀로서 뛰어난 여류 문인인 사도운(謝道韞)에 대하여 어떤 이가 평하기를 “신정이 소산하고 명랑하여 임하의 풍기가 있다.[神情散朗 故有林下風氣]”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六》 임학보객【林鶴報客】임학은 곧 송(宋) 나라 때 은군자(隱君子)로 불리던 임포(林逋)의 학을 이름. 임포가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항상 두 마리의 학을 길렀는데, 임포가 항상 작은 배를 타고 서호(西湖)에서 노닐었으므로, 혹 손이 임포를 찾아올 경우, 동자(童子)가 학의 우리를 열어 주면 학들이 나가서 날므로 임포가 그것을 보고서 손이 온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史 卷四百五十七》 임학지【林壑志】숲속 산골에 은거하고픈 마음을 말한다. 임행인【林行人】외교(外交)를 맡은 관명(官名)이다. 임헌시【臨軒試】왕이 나와서 직접 보이는 시험을 말한다. 임화정【林和靖】화정은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시호. 성품이 담박하여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처자도 없이 서호(西湖)에 은거한 지 20여 년 동안 한 번도 성시(城市)에 나오지 않았다. 서화와 시문에 능하였으며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는 것을 취미로 삼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매화는 그의 아내이고 학은 그의 아들이라 일컬었다. 그의 매화시(梅花詩)에,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에 비치고, 그윽한 향기는 황혼의 달에 풍기누나[踈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이라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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